회의실 문이 닫히자, 공기는 서서히 무거워졌다.
오늘 안건은 작은 사업의 예산 조정.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 어느 부서가 부담을 지느냐에 따라 책임이 달라지는 일이었다. 모두가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서로의 눈을 피해 흘렀다.
“자, 이 부분은 누가 결정해 주시겠습니까?”
국장님의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은 정적에 잠겼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 물컵 속 얼음이 흔들리는 소리만 또렷했다.
책임이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은 종종 투명인간이 된다.
“저는 일단 실무 검토만 했습니다.” 한 과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말은 곧 “결정은 내 몫이 아니다”라는 의미였다.
이어 다른 팀장이 손을 들었다.
“자료에 입장은 다 적었습니다. 판단은 사무국에서 하셔야죠.”
책임의 공은 탁구공처럼 이쪽저쪽으로 튕겨 다녔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정작 손에 쥐려는 이는 없다.
그때 국장님이 내 쪽을 바라봤다.
“박과장 생각은 어떻습니까?”
순간,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쏠렸다. 자료를 다시 확인하는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불만이 쏟아질 게 뻔했다.
‘입을 열면 결정을 떠안는다. 하지만 닫으면…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 사안은 어느 부서가 더 낫다의 문제가 아니라, 기관 전체의 우선순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산을 쪼개는 게 아니라,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순간 몇몇 표정이 굳어졌다. ‘예산을 나누자’는 기존 합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안은… 이번엔 A 부서에서 부담하고, 다음 분기에는 조정 절차를 공식화하는 겁니다.”
회의실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는 듯했다. A 부서장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 동료가 다가와 속삭였다.
“과장님, 결국 본인이 총대 메셨네요.”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내 마음에는 씁쓸한 무게가 남았다. 책임을 진다는 건 결국 누군가 미움받는 자리에 서는 일이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면서 회의 장면이 떠올랐다.
책임을 피해 눈을 돌리던 모습, 입술에만 맴도는 ‘우리는 한 팀’이라는 말. 그 민낯은 불편했지만, 현실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버스 창가에 기대어 생각했다.
‘책임이란 게 본래 이렇게 무거운 걸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쉽게 내려놓아 버린 걸까.’
책임은 대체로 칭찬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불평, 부담, 때로는 비난이 따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피한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순간, 조직은 방향을 잃는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책임을 피하는 건 쉽지만, 그 대가는 결국 모두가 나눠 져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짊어지고, 절차로 나누는 길을 만들자.’
책임을 진다는 건 단순히 결정을 내리는 일이 아니다.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는 일, 그리고 그럼에도 조직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