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의 칼끝

by 단호박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속으로 짧게 기도했다.
‘제발 오늘은 조용히 지나가길….’


아침부터 밀린 업무가 산더미였지만, 회의라는 이름 아래 모두 모였다. 커다란 직사각 테이블 위에는 서류와 물병, 볼펜이 뒤엉켜 있었고, 형광등 불빛은 괜히 더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직원들의 얼굴에는 긴장 반, 피곤 반이 묻어 있었다.


그때, 펜을 돌리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A과장이 내 쪽을 보며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과장님, 또 PPT에 글씨만 가득 채우신 거 아니에요? 요즘은 그림이 대세라니까요~.”


회의실 안이 가벼운 웃음으로 흔들렸다. 옆자리 후배는 피식 웃음을 참다 고개를 숙였고, 몇몇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나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속은 싸늘해졌다.


‘또 시작이군.’


그의 농담은 언제나 농담 같지 않았다. 웃자니 기분이 상하고, 무시하자니 모두가 보는 앞이라 더 불편했다.


“뭐, 제가 글씨를 좋아하긴 하죠.”
억지로 받아쳤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안건 보고가 시작되자, 그는 또 손을 들었다.
“아, 근데 말이죠. 이 부분은 우리 부서가 다 하는 거잖아요? 사무국은 그냥 이름만 올려놓는 거 아닌가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누구도 쉽게 반응하지 못했고, 시선은 하나같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나는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도 그냥 넘길까? 아니면… 이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까?’


나는 펜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A과장님, 말씀하신 부분은 이미 조율된 사안입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짧고 단호한 말에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A과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넘겼지만, 그 미소는 내 귀에 오래 남았다.


회의는 이어졌지만, 그의 농담에 다시 웃는 사람은 없었다. 분위기는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회의가 끝난 뒤, 복도로 나오는 길에 후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과장님… 아까 말씀 잘하셨어요. 저도 속으로 답답했거든요.”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씁쓸했다. 왜 늘 누군가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걸까. 조직이 건강하다면, 그 자리는 늘 혼자만의 몫이어서는 안 될 텐데.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모니터를 켜 두고 보고서를 정리하는 척했지만, 머릿속에는 회의실 장면이 계속 재생됐다. A과장의 웃음소리, 직원들의 시선, 떨리던 내 목소리.


‘내가 너무 예민했을까? 아니면 더 강하게 말했어야 했을까.’
끝없는 자기반문이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창밖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혹시 저 사람도 자기 불안과 외로움을 농담으로 감추는 건 아닐까.’


그를 미워하는 마음 뒤로, 아주 작은 이해가 스쳤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말이 옳아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이 농담의 칼끝을 진짜 웃음으로 바꿀 수 있다면, 나 자신도 조금은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때까지는, 나를 먼저 단단히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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