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자 발표가 있던 날, 사무실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모두가 이미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명단이 붙자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역시 B부장이지.”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또 다른 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 마음도 복잡했다. 예상대로였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B부장은 언제나 눈에 띄었다. 회의에서 그는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었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성과가 있으면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덧붙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직접 주도했습니다.”
그 말 속에는 늘 ‘기억해 두시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동료들은 그를 불편해했지만, 윗사람들은 오히려 칭찬했다.
“역시 추진력이 있어.”
“결단력이 남다르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건 추진력이 아니라 자기 과시 아닌가.’
조직은 왜 이런 사람을 선택할까.
첫째,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조용히 땀 흘리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회의마다 자기 이름을 외치는 사람은 쉽게 기억된다.
둘째, 위험을 감수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무모한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말하는 태도는 ‘리더십’이라는 포장지를 입는다.
셋째, 성과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팀 전체의 노력이라도 보고서와 발표에서 “내가 했다”라고 말하는 순간, 기록은 왜곡된다.
며칠 뒤, B부장과 함께하는 실무 회의가 열렸다.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안건은 제가 이미 정리했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시죠.”
그러나 세부 내용은 엉성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부장님, 현장 상황이 달라 다시 조율이 필요합니다.”
그의 표정에 잠시 그림자가 스쳤다.
“박과장, 너무 소극적으로만 보지 마세요. 저는 큰 그림을 보는 겁니다.”
순간, 내 지적은 ‘현실을 모르는 비협조’로 포장되고 말았다. 회의는 그의 목소리에 끌려갔고, 나는 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책상 위 메모지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조직은 왜 나르시시스트를 선택하는가?
→ 조직이 당장의 성과와 목소리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또 한 줄을 더했다.
“→ 결국 우리가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은 완벽한 리더를 찾지 못한다.
다만 눈에 띄는 사람, 확신에 차 보이는 사람을 고를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나르시시스트가 선택된다.
그러나 그 선택은 오래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남긴 빈자리는 더 큰 상처로 돌아온다.
나는 다짐했다.
나르시시스트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묵묵히 버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빛나지 않아도, 조직은 그런 사람들 덕분에 굴러간다.
책임자란 결국 자기 이름을 남기는 자리가 아니라, 타인의 이름을 지켜주는 자리여야 한다.
그것을 잊는 순간, 조직은 번쩍 빛나지만 금세 꺼져버리는 불꽃에 의존하게 된다.
나는 오늘도 속으로 기도한다.
‘조직이 진짜 필요한 사람을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