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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는

지원사업으로부터 독립할 언젠가의 미래, 어디론가 마저 나아갈 이야기

by 단휘

많은 것들이 언젠가의 기억으로 어렴풋한 흔적만 남은 채 사라져 간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동시에 가장 어두웠던 기억 또한 이제는 수많은 기억 중 하나로 흩뿌려졌다. 어찌 보면 아주 오래전, 나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고 사람을 등지게 만든 원인이 되는 시간의 기억이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지난날의 일부가 되었다.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건 여전하지만 더 이상 나를 심연의 어둠으로 끌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끝에, 분명 괜찮을 것이다. 분명 작년의 어느 시점까지는 닿으면 아픈 기억으로 존재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렇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올 초에야 인지했다.


여러 가지로 유해진 면이 있긴 하다. 레몬청을 타서 마시던 컵을 실수로 쏟는다거나 좋아하던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현실에 대한 원망이 이제는 그렇게까지 격렬하게 차오르지는 않는다. 마음속 한 구석이 답답하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대체로 괜찮다. 대체로. 이 “대체로”에 포함되지 못한 것들은 남들도 다 가지고 있을 법한 무언가겠지, 하며 현재의 나 자신이 꽤나 괜찮은 상태일 거라고 주장해 본다.


여전히 의욕이 없는 날들이 있다. 여전히 잘 흘러가지 않는 날들도 있다. 그래도 한없이 정체되는 느낌보다는 잠깐 머무르는 느낌에 가깝다. 항상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또다시 세상의 뒤편에 숨어있기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씩 회복되어 가던 것들이 다시 무너지려고 할 때 붙잡아주며 서로 응원하고 지지해 주던 이들이 서로의 마음속에 작지만 강한 힘을 불어넣어 주었기에, 혼자 어둠 속을 방황하던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을, 헤매더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빛을 얻은 것이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누군가에겐 조금만 흔들려도 꺼질 것만 같은 약한 불꽃이라도, 지원사업을 통해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조금이나마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연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청년기지개센터의 이번 연도 OT가 언제 진행될지 기약이 없었지만 어느새 올해 지원사업도 시작되었다. 이 OT를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우리를 세상 앞에 나설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프로그램 그 자체의 영향일 수도 있고, 그것을 진행해 주시는 분의 영향일 수도 있고, 함께 하는 청년 분들의 영향일 수도 있겠지.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우린 어디론가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 밖 어딘가에 가려져 있었고, 지금은 이곳에 있지만, 언젠가는 지금의 순간들도 옛 기억으로 남겨둔 채 나아가겠지. 다른 사람들과 섞여 그렇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어디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온통 두려운 것들뿐이다. 결국에는 마주하고 도전해야 할 것들이지만. 그래도 그것들을 외면하고 도망치기보다는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은 있다. 단지 그것이 약간, 아주 약간은 두려울 뿐이다. 그 두려움 속에 주저하는 나를, 그리고 당신을, 우리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한 날들이 붙잡아주리라 믿는다. 아직 모든 것이 서툴고 미숙하지만, 나이에 비해 경력도 역량도 부족한 녀석들일지라도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어디라도 닿을 수 있겠지. 그것이 꿈꿔왔던 최선의 삶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런들 뭐 어떤가. 방구석에서 반쯤 죽어있던 시간과 비교할 수나 있을까.


어찌 되었건 난 지원사업의 수혜를 조금만 더 받으려 한다. 지금 느낌으로는 내년이나 후년쯤에는 이곳으로부터 독립해 나의 길을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몇 년 동안 나아진 것들을 생각하면 분명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주변에도 청년이음센터 출신 청년들 중에는 슬슬 독립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동안 지원사업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이제는 그 도움보다는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겠다고 자발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고, 취업 등의 이유로 현실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어려운 김에 홀로 서본다는, 약간은 타의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할 시간을 잘 나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원사업의 도움을 좀 더 받고 싶다고 하는, 나 같은 이들도 있지만 말이다. 어떠한 이유로든 지원사업으로부터 독립해 나아가는 이들을 보며, 나 또한 나의 미래를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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