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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이 진행되지 않는 시기

사업과 사업 사이, 그 시간을 버텨낸다는 것

by 단휘

지원사업이라는 것의 특성상 연말에 사업 보고를 하고 연초에 예산 책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필연적으로 공백기가 발생한다. 몇 년 단위의 장기 사업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덜하지만 그런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청년이음센터에서 청년기지개센터로 넘어갈 때에는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몇 개월이 지났기에 그 빈 시간의 크기를 체감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그 해 연말에 청년이음센터에서의 몇 개월의 시간이 허상처럼 느껴지고, 심한 경우 다시 예전과 같은 고립 또는 은둔 상태로 돌아가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 이들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공식적인 프로그램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 상태로 그저 다음 연도 사업이 시작되길 막연하게 기다릴 뿐이다.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거긴 하지만, 지원사업의 도움 없이 몇 개월을 보내다 보면 힘들었던 시간으로 돌아가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낀 청년 중 의지가 있는 이가 주축이 되어 정기적으로 생명의전화사회복지관의 공간을 빌려 청년공간처럼 운영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나도 가끔 방문하긴 했지만 그곳에 모이는 이들은 대체로 나하고는 아주 약간의 상호작용을 할 뿐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아니었기에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종의 이유로 중단되어 더 이상 운영을 하지 않는다고 전해 들었고, 그 뒤로는 가끔 다른 청년 분들이랑 모일 건데 참여할 거냐고 연락 주시는 분이 있을 때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것 외에는 그들과 별다른 상호작용이 없었다.


전보다는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이 생기긴 했지만 친구는 되지 못한 무언가 정도의 관계성으로 사업과 사업 사이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다른 이들은 꾸준히 연락도 하고 만나며 가까워지는데 나는 그 집단에서 겉도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단체 채팅방에서 소통하는 그들 집단에 제대로 속해 본 적도 없긴 하다. 누군가 제안했을 때 불편한 사람이 껴 있는 집단에 자발적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내가 거절한 것도 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내 손으로 부숴놓고 내가 외로워하는 모순적인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하여간 지원사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보냈던 그때와 달리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지원사업이다 보니 청년기지개센터 1년 차와 2년 차 사이에는 연말연초에도 규모가 줄었을 뿐 조금씩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Zoom 화면 너머로 홈트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센터 외부에서 진행하는 전통무예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여러 가지 신체 활동을 하며 조금이나마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가끔은 프로그램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이름 모를 낯선 청년 분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말이다. (분명 통성명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영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작정하고 의식적으로 외우지 않으면 기억에 남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몇 번 미뤄지기는 했지만 1년 차의 OT에 비해 2년 차의 OT는 이른 시기에 진행되어 센터 활동이 일찍 시작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훨씬 연속적이어졌기에 사업의 효과도 더 잘 드러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집이라는 이름의 공간도 작년의 사업과 올해의 사업 사이의 시간을 보내는 데 유의미한 도움이 된 것 같다. 집구석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어디라도 나가야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거나 한없이 가라앉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을 때,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보다 나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끔은 프로그램에서 마주친 바 있는 청년 분을 보고 서로 가볍게 목례하며 지나치기도 했다. 좀 더 친밀감이 쌓인 청년 분을 만나게 되면 서로의 근황 이야기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말이다. 초반에는 다른 청년 분들과 좀 더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여서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청년 분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공부하는 사람들도 늘고 왠지 떠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가서 아쉬운 면이 있었다. 그렇게 고립감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보다는 서울청년센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공간이 되어가며 기존에 자주 오던 청년 분들이 잘 안 오기 시작하더라. 날이 추워지면서 줄어든 것도 한몫했겠지만 매주 두세 번씩 방문하면서 느끼기엔 기온이 떨어진 것과는 좀 시차가 있었다. 사실 공간 자체가 활용성보다는 겉보기 좋은 데 치중되어 있는 느낌이 좀 있어서, 몇 번 와보다가 실망하고 안 오는 분들도 있을 것 같긴 하다.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오고 싶은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는 분들이 종종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나에겐 그 공간이 준 이점이 더 컸던 것 같다. 이 글의 초안도 우리집 내방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작성했고 말이다. 집에 너무 오래 있으면 무기력해지고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어진다. 하루이틀은 괜찮은데 일주일 이상 안 나가면 은둔 프로세스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디라도 나가 주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운데, 그렇다고 카페에 가자니 쌓이고 보면 지출이 어마어마할 것 같고 서울청년센터는 왠지 처음 발을 들이기가 어려운 것 같다. 프로그램 참여하러는 몇 번 가봤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러 가는 건 왠지 잘 안 가게 된다. (아마 떠들기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야기한 우리집 공간에서 공부하시는 분들도 그런 이유에서 이곳에 와서 공부를 하셨을 것 같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편해진 공간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집에 있기 싫을 때 오기 좋은 곳이다. 기술교육원 다니기 전까지 스낵바를 운영하는 월수금에는 스낵바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가곤 했다.


사업을 통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홀로 설 자신은 없는 이들에게는 사업이 진행되지 않는 시기에 버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연 단위의 큼직한 흐름은 있어도 도중에 완전히 끊기지는 않는 청년기지개센터 같은 장기 사업이 필요한 것 같다. 연말연초에 중앙에서 진행하는 약간의 프로그램 말고도 권역에 따라서는 정기 모임을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는 모양이더라. 1월의 어느 날에는 중랑-동대문 권역의 모임에 살짝 껴서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속해있는 성동-광진 권역보다 중랑-동대문 권역에 아는 사람이 더 많아 그곳이 더 내적 친밀감이 강하다는 건 여담. 우리 권역은 연말연초에 면담 한 번씩 한다고 하더니 진행되는 건 없던데 말이다. 저어기 노원-도봉 권역은 이미 권역 OT를 진행한 것 같던데...


최근에 든 생각인데, 연말에 모든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다음 해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은 누군가에게는 힘든 시기일 수도 있지만, 지원사업으로부터 독립해 나아갈 언젠가의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제까지나 마냥 지원사업에만 의지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고, 어느 시점에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직은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사업에 참여하기 전과는 어떻게 다른지, 뭐가 나아졌고 뭐가 아직 힘든지,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작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마 작년보다 올해 더 성장한 만큼 올해가 되어서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이제야 그런 걸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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