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계절
2024년 11월 23일 토요일 갑진년 을해월 신묘일 음력 10월 23일
나는 여름을 선호하고 겨울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더위를 잘 타지 않고 추위를 잘 타는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여름에도 반팔보다 긴팔을 입고 다니는 경우가 많고 겨울에 일상생활이 안될 정도의 추위를 느끼곤 하니까. 하지만 나의 더위 내성과 추위 내성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식은 약간 과장되어 있는 듯하다.
난 온도 그 자체보다는 온도 차이에 대한 내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여름에 긴팔 입고 더운 것보다 반팔 입고 에어컨을 마주치는 게 더 힘들다. 에어컨 방지용 외투를 챙겨 다니면 되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냉기를 인지했을 때 옷을 입으면 이미 늦었다. 온도에 대해 반응 속도가 느려서 내가 춥다고 느꼈을 땐 이미 컨디션이 악화되기 시작한 후일 확률이 높다.
날씨가 서서히 추워지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남들보다 패딩을 늦게 꺼내는 편이다. 이렇게 서서히 변하는 온도에는 그럭저럭 잘 적응하는 편이다. 사실 올해의 날씨는 서서히 변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예전엔 계절과 계절 사이가 스펙트럼처럼 서서히 변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계절에 대한 선호는 엄밀히 말하면 온도 때문만은 아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름에는 신체적인 건강이 악화되는 경향이 있고 겨울에는 정신적인 건강이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애매하지만 여름의 에어컨은 컨디션 난조를 악화시킨다.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난 핫팩을 겨울보다 여름에 더 많이 사용한다. 겨울이 야기하는 정신적 이슈도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다. 일조량의 변화로 인한 뭐시기 뭐시기 하는 이론이 있긴 하던데 그런 것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인지, 놀랍게도 명리학적인 게 딱 들어맞아 물의 계절이 나를 녹슬게 만드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원인 모를 정신 건강 악화가 있다 보니, 이 계절에는 다른 계절에 비해 예민하게 구는 경우도 많다. 다른 시기에는 적당히 넘기면서 지냈을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이 계절에는 견디지 못하고 거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알고 있기에, 적당히 무난하게 지내고 싶어서 요즘 잘 안 만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계절에 괜히 잘못 마주치면 손절해 버릴 수도 있지만, 이 계절만 지나면 그럭저럭 잘 지낼 사람이다.
그래도 내 삶에 대한 경험치가 어느 정도 쌓였다고, 불가항력에 가까운 특성들에 대해 조금씩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아직 대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여러 가지 이슈가 발생하곤 하지만 말이다. 요즘 또 정서 불안이 세게 오는 경우가 있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은 순간들도 있고, 겨울의 특성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사고가 느려지고 글도 잘 안 써진다. 빠릿빠릿하게 행동하기 힘든데 일요일의 캐스팅은 나에게 퀵체인지를 요구한다. 쉽지 않다. 재정적/정신적 이슈로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겨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드렸으니 이번 공연을 마치고 슬슬 정리를 하던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