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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Mar 20. 2018

지금까지도 잘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올해 나의 목표는 계획을 많이 세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목표 없이 올 한해를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계획이 없다고 해서 삶이 아주 형편없어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나는 계획 없이도 매일매 잘 살아내고 있었다. 한 해가 끝날 즈음에 이룬 것이 없다고 한탄할 지는 몰라도 어쨌든 3월 중순이 지난 지금의 나는 내 삶에 꽤 만족스럽다. 다이어리에 거창하게 올해의 목표라고 적어둔 몇 개의 글자 때문에 늘상 나를 찔러대며 괴롭히는 빚쟁이같은 마음도 사라졌고, 덕분에 나는 오히려 계획하지 않았던 새로운 일들을 더욱 찾게 되었다. 해야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정말 값진 여유였다.


원래 나는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계획을 지키는 것은 나중 문제이지만 일단 계획을 세워가는 과정을 항상 즐겼다. 후에 그것을 이루었느냐의 결과에 따라 마음이 들쑥날쑥 하기도 하지만 늘 그랬듯이 나는 항상 틈만 나면 계획을 세웠다. 오늘 할일, 내일 할일, 이번 달에 할일, 올해 안에 할일, 심지어는 향후 5년 뒤의 중장기 계획까지. 아무래도 공무원이 되었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계획을 차곡차곡 세워놓고 보면 마치 이미 다 이룬 것처럼 흡족했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무언가 해야할 일이 없는 상태가 불안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닐 때부터 어른이 되어 회사를 다닐 때까지도 늘 누군가가 시키는 일들과 정해진 일들에 익숙하게 살아왔으니까. 프리랜서 혹은 자발적 백수의 삶을 시작하면서 누군가가 지시하지 않는 나의 시간을 꾸려나가는 것이 처음엔 꽤 낯설었다. 상대적으로 나만의 시간이 많아진 상황 속에서 나는 그걸 즐기기는커녕 지금보다도 무언가를 더 해야할 것만 같은 압박 속에 살았다.


서울로 오가는 기차 안에서의 한 시간도 어떻게든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사실 KTX 안에서 창밖을 보는 이는 드물다. 나 역시 그랬다.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열차는 말하지만 KTX를 타는 수많은 사람 중에 과연 진짜 여행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으니까. 나 또한 매주 학교를 오가는 시간을 여행으로 삼지 않기에 마냥 넋 놓고 기차 밖 풍경을 바라보기 마음이 찔렸던 것이다. 무거운 교재 사이에 책 한권을 더 챙길지 노트북을 가져갈지 아니면 휴대폰에 영화라도 담아갈지 매번 고민하고 망설였다. 어쩌다 피곤해 잠이 들어버리면 괜히 시간을 날린 것만 같았다. 누가 나무라지도 않는데 나는 계획 없는 내 삶을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못살게 했다. 


그러다 문득 달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내 올해 다이어리를 봤다. 목표가 없던 이번 한 해에도 나는 여전히 열심히 달려왔다. 해야할 일이 많지 않았던 덕분에 긴 여행을 했고, 소중한 이들도 잔뜩 만났고, 누군가의 부탁이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뜻밖의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기도 했다. 모두 값진 여유가 있는 덕분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세워둔 거창한 목표와 빽빽한 계획 대신에 여유로운 삶이 내 시간을 채워갔다.


그래서 나는 내 삶에 대한 태도를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억지로 해야할 일을 만들기 보다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월화수목금 어떤 요일에 무슨 일을 얼마나 해야할지 일일이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사실 내가 하는 일들이야 내내 비슷하겠지만 계획에 따라 해야할 일을 하는 것과 그 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같은 일이어도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의 평안과 함께 삶의 변화가 찾아왔다. 허리가 아파 유튜브에서 잠자기 전 스트레칭과 눈 뜨자마자 스트레칭을 생각날 때마다 따라하며 통증이 감소해갔고, 욕심 내지 않고 배운 한 가지 영어표현을 적당한 순간에 써먹기도 했다. 서울 가는 날 가방에는 그 날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챙겼고, 낙서를 하고 싶어지면 드로잉북을 챙겼다. 그 마저도 다 귀찮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엔 그냥 이어폰만 챙겨갔다.


무엇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나무라는 마음이 없으니 세상 평화로웠고,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해 느끼는 실망감보다 일상에서 소소한 만족감을 얻는 일이 분명 훨씬 더 즐거웠다. 혹여 누군가가 형편 없다 나무란다 해도 내 기쁨을 이길 순 없었다. 조금씩 값진 여유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갔다. 이제야 진정한 자발적 백수라 할만 했다. 


3월의 끝자락, 지금까지도 잘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잘 살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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