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고학년 때 나에게도 2차 성징이 찾아왔다. 가슴이 봉긋하게 나오기 시작하니 티셔츠를 입고 반듯하게 설 때 가슴이 도드라졌다. 당연한 변화였지만 그땐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 때부터 나는 내 가슴이 자라나는 티를 내기 싫어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다녔다.
그 시기에 엄마는 많이 바빠서 나의 변화에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그렇게 몇 달을 지내며 자세와 어깨가 둥그렇게 굽고 굳었을 즈음,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내 신체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속옷 가게에 나를 데려가 내 인생의 첫 브래지어를 사준 것은 바쁜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와주러 시골에서 올라오신 외할머니였다.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차 옥순 여사.
외할머니는 나의 유년시절에 엄마만큼 큰 추억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항상 바빴던 엄마를 대신해 종종 시골에서 올라와서 몇 달간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며 나와 오빠를 돌봐주고 집안일을 챙겨주신 외할머니.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함께 머무를 때면 그 시기는 유독 집이 훈훈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냄새’라는 표현이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어린 나이였지만 몸으로, 온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람과 온기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기에 외할머니가 집에 있는 때만큼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참 가볍고 즐거웠다.
우리 집에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존재 자체만으로 내게 행복감과 따뜻함을 주었던 외할머니. 내 기억 속 외할머니는 요리를 아주 잘 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돼지껍데기 무침이다. 빨간 고춧가루 양념에 꼬들꼬들하고 쫀득한 돼지껍데기를 버무린 반찬 내지는 요리인데, 외할머니는 그걸 유독 자주 만들어줬다.
외할머니가 그걸 잦은 간격으로 해주는 날이면 “할머니, 또 돼지껍데기야?”하면서도 나는 돼지껍데기 무침을 뚝딱 해치우곤 했다. 그 음식이 이렇게 많이 그리워지는 시간이 올 줄 미리 알았더라면 더 맛있게 많이 먹어 뒀을 텐데...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편찮으셨는데,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우리 학교와 가까운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하고 입원해 계셔서 나는 학교를 마치고 수시로 할머니의 병원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외할머니의 병원에 갈 때마다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어묵이나 델리만쥬 같은 먹을 것을 사들고 가곤 했는데, 외할머니는 말로는 “뭐 이런 걸 사왔다냐”하면서도 아주 맛있게 기쁘게 드셨다.
그 시절 나에게는 그게 행복이었다. 병원 생활과 병원 밥에 질린 외할머니가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내가 사간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것도 좋았고, 같은 병실을 쓰는 분들에게 자랑하듯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았다.
내가 외할머니에게 얼마만큼의 시간 혹은 돈을 쓴다 해도 어릴 적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과 돌봄을 갚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없었다면 내 유년시절은 더 많이 외롭고 건조했을 테니까.
이후 외할머니는 본가가 있는 금산으로 내려가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외할머니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닐 때에는 치매 증상을 보였으며, 그것이 점점 악화 되어 요양병원에 가게 되었다.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뒤 처음 외할머니를 보러 내려갔던 날, 요양병원의 침대에 누워 생기 없는 눈으로 나를 맞이하는 외할머니를 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너무도 빠르게 흘러버린 세월이 야속했고, 그 세월과 함께 늙고 병들어버린 외할머니가 너무 불쌍하고 가여웠다.
그리고 2012년 12월 31일, 나는 나의 춥고 외로웠던 유년시절을 구석구석 따뜻하게 데워주고 사랑으로 채워준 외할머니를 떠나보냈다. 하필이면 그 때 해외에 있던 나는 너무나 죄스럽게도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고 장례식장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죄책감이 남아있는 것은 외할머니가 내게 준 넘치는 사랑과 보살핌을 조금이나마 갚을 마지막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렸기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차 여사, 할머니가 있어서 내가 덜 외롭고 따뜻하게 자랄 수 있었어.
덕분에 꽤 괜찮은 신랑감을 만나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쁜 아가도 낳았다?
하늘에서 다 보고 있지?
너무 너무 사랑해 할머니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