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정 할매가 다녀간 이후, 서연정은 하루아침에 기운이 달라졌다. 그날부터 가게 앞 마당에는 전날보다 조금 더 많은 발자국 자국이 찍혔다. 낯익은 얼굴도, 지나가던 행인도 “정 할매가 다녀갔다.”는 말에 호기심 가득 들어섰다. 도하리 사람들은 의심이 많으면서도, 누군가의 인정 한 마디에 금세 마음을 돌리는 사람들이었다. 진안은 감사했지만 동시에 숨이 가빴다. 손님이 늘어나니 주방에 붙들려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손길을 들여 가꿔야 할 텃밭은 어느새 잡초로 삼켜져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는 텃밭을 아침마다 기웃거리며 마음만 졸이던 진안은 결국 광운을 붙잡았다.
“제발 좀, 텃밭 좀 어떻게 해봐. 내가 못 나가겠어.”
광운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섰다.
“내가 왜.”
“부탁할게. 응? 나 저 텃밭 진짜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그런 거면 더더욱 네가 직접 해야 말이 되는 거 아냐?”
“시간이 너무 없어. 더 바라지 않을게, 땅만 고르게 해줘! 진짜, 친구야. 응?”
진안의 끈질긴 달라붙음에도 광운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만 홱 돌렸다. 하지만 진안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모으자,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는 광운이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밖으로 나와 우거진 텃밭을 바라보는 광운은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결국 광운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광운은 오토바이를 몰고 춘식 아저씨네 집으로 갔다. 집은 낮은 돌담에 둘러싸여 있었고, 마당에는 고추장이 담긴 장독대가 줄지어 있었다. 볕에 그을린 춘식 아저씨는 호미를 들고 고랑을 긁고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이마에는 땀이 반짝였다.
“잡초부터 다 뽑아야지.”
광운이 멀뚱히 밭을 바라보며 “뭐부터….” 하고 말을 잇자, 아저씨는 단칼에 잘랐다.
“거기 다 정리하라고. 아무것도 없게. 잡초랑 같이 두면 아무것도 안 커.”
말끝은 퉁명스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건 경험이었다. 광운은 짙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옆에서 낮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좀 도와줘?”
춘식 아저씨의 조카, 소영이었다. 단정한 얼굴에 햇볕이 내려앉아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웃을 때마다 눈가에 작은 주름이 번졌다. 머리를 한 결로 단단히 묶고 소매를 걷어붙인 그녀의 모습은 이미 준비된 일꾼이었다.
“나 오늘 좀 한가한데, 원하면 도와줄게. 삼촌, 다녀와도 되죠?”
소영의 말에 춘식 아저씨는 고개만 절절 흔들었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광운은 잠깐 멈칫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광운이 타고 온 오토바이로 소영을 태우려고 했지만, 소영은 오는 길에 들릴 곳이 있다며 자신의 오토바이를 몰고 가겠다고 앞장서라고 할 뿐이었다. 광운이 소영과 함께 서연정 마당에 도착했을 때, 창문으로 힐끗 바라본 진안은 깜짝 놀랐다. 광운이 여자와 함께 있는 건, 보기 드문 일뿐만 아니라 상상으로도 쉽게 되지 않는 진안이었다.
‘저 숫기 하나 없는 녀석이 여자랑…?’ 진안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곧 웃음을 삼키고 다시 국자로 된장을 저었다.
텃밭 앞에 선 소영은 잡초투성이 밭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거 일이 많겠네.”
광운이 대답을 못하자, 그녀는 턱, 하고 그의 등을 쳤다.
“얼마 줄래?”
“네?”
“내가 이 텃밭 기초 닦아줄 테니 얼마 줄 거냐고.”
광운이 더듬으며 “이건 제 텃밭이 아니라….”라고 말을 흐리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농담! 시골은 원래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근데 바쁠 땐 못 도와주니까, 오늘은 같이 힘이나 좀 쓰자고!”
소영은 뒷주머니에 항상 차고 다니던 장갑을 끼고 망설임 없이 잡초를 잡아당겼다. 손끝에 흙이 묻고, 뿌리째 뽑히는 소리에 땅의 숨결이 실렸다. 풀들이 뽑힐 때마다 텃밭의 윤곽이 조금씩 살아났다. 광운은 서툴렀다. 잡초가 중간에서 똑 부러지기 일쑤였다.
“아니, 뿌리를 흔들어야 한다니까.”
소영이 직접 손으로 보여주자, 광운은 말없이 그를 따랐다. 서툴렀던 손이 시간이 갈수록 익는다.
점심 장사를 끝내고 주방에서 뛰어나온 진안은 눈을 크게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덤불 같던 텃밭이 제법 가지런해져 있었다. 잡초 더미 옆에는 작은 흙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거 드세요. 시원하게 녹차 우렸습니다.”
진안이 녹차를 내밀자 소영은 허리를 펴고 녹차 물이 목을 타고 땀에 젖은 옷을 다시 젖게 할 만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총각은 뭘 좀 아네.”
진안은 또한 고운 보자기를 꺼내 소영에게 건넸다. 안에는 작은 통에 담은 들깨버섯죽과, 오이무침, 삶은 달걀, 조촐한 김밥 두 줄이 들어 있었다.
“점심도 못 드셨을 텐데 이것저것 싸봤습니다. 춘식 아저씨도 같이 드시라고 넉넉히 넣었어요.”
“와, 공짜 노동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 횡재야.”
소영은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음식, 소문만 들었는데 드디어 먹네.”
대충 일이 끝나자 그녀는 도시락을 안전하게 싣고는 오토바이에 올랐다. 소영이 오토바이의 핸들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함소영이야! 너희보다 누나니까 깍듯하게 모셔!”
“네, 누님! 조심히 가세요!”
진안이 웃으며 소영이 가는 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광운은 죽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밥, 빼먹은 건 아니겠지?”
“아니지. 어서 씻고 와. 오늘 메뉴는 들깨버섯죽에 소고기 볶음 곁들임이야.”
광운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땀으로 젖은 그는 주방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다음 날, 손님이 일찍 끊긴 서연정은 모처럼 해가 지기 전에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마당에 낯선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광운이 나가보니 춘식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빛은 흔들렸다. 처음 보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저기…. 아직 문 열었나.”
소란을 듣고 나온 진안이 아저씨를 안으로 데려다 보리차를 내주었다. 아저씨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 손을 떨며 컵을 내려놓았다.
“실은…. 마누라가 요양병원에 있어. 벌써 5년은 됐지. 첨엔 괜찮았는데…. 요새는 도통 뭘 안 먹어. 패혈증도 몇 번 왔고….”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에 담긴 무게는 컸다. 평생 땅을 다루며 고개 숙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애써 꾸역꾸역 삼키는 눈물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듯했다.
“근데…. 어제, 소영이가 가져온 도시락에 죽이 있더라고. 무슨 죽인지 나는 그냥 마누라 생각이 나서 가져갔는데, 마누라가 그걸 먹더라. 그거 말곤 아무것도 안 먹는데…. 그건 다 먹었어. 그래서…. 좀, 부탁을….”
진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음식이 이렇게 쓰인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그는 풀었던 앞치마를 다시 묶었다.
“오늘도 만들어 드릴게요. 광운아, 도와줘.”
광운이 진안의 요청에 곡식을 씻어 물에 불렸다. 맑은 물 위에 하얀 쌀알이 둥둥 떠올랐다 가라앉으며 작은 은빛 물결을 만들었다. 쌀은 불리며 서서히 빛을 머금었고, 그 사이 진안은 들깨를 볶아 고소한 기름기를 먼저 우려냈다. 마른 들깨알이 팬 위에서 톡톡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고, 고소한 향이 주방 가득 번졌다. 볶은 들깨를 곱게 갈아내니 잿빛이 감도는 고운 가루가 바람처럼 풀어졌다.
표고와 새송이는 얇게 저며 썰어 넣었다. 칼날이 버섯 결을 따라 미끄러질 때마다 부드러운 결이 갈라졌다. 표고의 깊은 향과 새송이의 담백한 숨결이 함께 섞였다. 뚝배기 안에서 불려 둔 쌀이 은근한 불 위에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자, 들깨가루를 풀어 넣었다. 희고 탁한 국물이 차분히 일렁이며 뚝배기 벽을 타고 올라와, 곧 은은한 고소함이 뜨겁게 피어올랐다.
죽이 끓어오르며 뻑뻑해지자, 진안은 나무주걱으로 바닥을 살피며 천천히 저었다. 들깨의 미세한 알갱이가 국물 속에서 보드랍게 흩어지고, 버섯의 결이 국물 속에서 은근히 녹아내렸다.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밀려오는 향은 마치 산골 숲길을 걷다 마주친 흙내음 같았다.
마지막으로 진안은 소고기를 잘게 다져 볶아 고명으로 올렸다.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두르자 소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갔다. 고소한 기름 향과 붉은빛이 갈색으로 변해가며 진득하게 눌어붙는 순간, 간장 몇 방울로 향을 더했다. 잘 익은 고기를 한 줌 들어 끓고 있는 들깨죽 위에 솔솔 얹으니, 은은한 빛깔의 죽 위로 따스한 갈색이 점처럼 흩어졌다.
진안은 죽을 보온병에 담아 단단히 보자기에 싸서 아저씨에게 건넸다.
“아주머니께서 드시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춘식 아저씨는 두 손으로 그 음식을 받았다. 손등에 깊은 주름과 검은 점들이 많았지만, 그 손은 누구보다 단단하게 도시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고맙네…. 진짜 고맙네.”
그가 오토바이를 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안은 조용히 속삭였다.
‘할머니, 제 음식이 이렇게 쓰이는 게 저는 너무 기뻐요….’
춘식 아저씨를 보내고, 서연정의 불이 완전히 꺼졌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들어온 진안은 일기장을 폈다.
오늘,
들깨버섯죽 한 숟갈이
굳게 닫힌 입술을 열었다.
고집불통이라 불리던 사내의 눈에
오늘 처음, 물빛이 돌았다.
밥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건네는 것.
한 그릇의 뜨거움이
사람을 살렸다.
서연정 밖에서 시골 그득, 개구리 울음이 차올랐다. 흙내와 들깨죽 향이 섞여 아직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도하리의 여름밤은 깊고, 서연정의 첫 ‘특식’은 그렇게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