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리밥에 된장찌개

장편소설

by 무연


새벽은 늘 물처럼 시작된다. 주방 불을 켜자 스테인리스가 서늘하게 번쩍였고, 진안은 손을 씻고 앞치마 끈을 묶었다. 어제 막 도하리에 도착해 장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한 진안은 서울에서 미리 챙겨온 재료 박스를 하나씩 열어 살폈다. 보리쌀은 밤새 물에 불려두었고, 된장 항아리에서 덜어온 된장은 색이 깊었다. 멸치와 다시마를 찬물에 담가 두고, 애호박은 씨가 연해 보였으며, 양파는 단단했고, 두부는 방금 막 떠온 듯 탄력이 있었다. 시금치는 뿌리를 정리하고, 참깨는 팬에 약불로 살살 볶아 고소한 냄새를 깨워냈다.

칼날이 도마에 닿을 때마다 짧은 울림이 주방에 퍼졌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메뉴판은 두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서 나는 것, 그날 장에서 산 신선한 것, 특별한 사연이 없는 한 자연이 건네는 순서를 따르기로. “오는 사람 든든하게.” 할머니가 늘 하던 말이었다. “밥은 배를 채우는 게 먼저고, 이야기는 그다음이다.” 진안은 그 말을 믿었다. 밥 한 그릇이 사람을 다시 걷게 하는 날이 분명히 있다.

위층에서 삐걱, 발걸음 소리가 내려왔다. 아침잠이 얕은 광운이 눈을 비비며 계단을 반쯤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목에 수건은 여전히 걸려 있었고, 머리칼은 물에 적신 듯 흐트러졌다.

“좋은 아침.”

진안은 도마 위에서 시금치 뿌리를 툭 쳐내며 인사했다. 광운은 그저 손을 한 번 들어 답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켜고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어제 망치질에 뻐근해진 목 근육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난 아침 됐어. 볼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

“볼 일? 늦어?”

진안이 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광운은 컵을 가볍게 헹궈 털며 덤덤히 말했다.

“춘식 아저씨네 싱크대가 말썽이래. 봐달라셔. 늦진 않을 것 같은데…. 가봐야 알지.”

“춘식 아저씨?”

진안이 눈을 반짝였다.

“여기 오는 길에 큰 밭 있잖아. 거기 주인. 원하면 가는 길에 여기 문 열었다고 전하든지.”

“그럼 나 부탁 좀 하자!”

진안이 칼을 든 손으로 성큼 다가오자, 광운은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네가 나보다 도하리 사람들이랑 더 안면 있잖아. 읍내 돌면서 여기 홍보 좀 해줘!”

“뭐?”

광운의 표정이 잠깐 멈췄다. 타고난 말수가 적은 사람에게 ‘홍보’라니. 진안이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여기 사람 많이 드나드는 데 아니잖아. 마을회관, 노인정, 가능하면 학교, 그 정도?”

“정도….”

광운은 작게 되뇌었다.

“야, 나만 잘되자고 하는 거냐? 서연정 잘돼야 너도 좋은 거야!”

광운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설거지, 청소, 배달 상자 정리 정도일 줄 알았던 일이 ‘홍보 대사’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진안의 눈빛은 계속해서 번득였다. 장난기와 진심이 섞여 사람을 궁지로 몰지 않으면서도 마침내 움직이게 하는 눈.

“…알았으니까, 그 칼부터 치워.”

진안은 “에헤이.” 하고 웃으며 칼을 내려놓았다.

“잘 다녀와. 돌아오면 된장, 딱 맞춰 둘게.”

광운이 나가고, 오전의 시간은 길게 늘어났다. 보리쌀과 쌀을 반반 섞어 솥에 안치고, 멸치·다시마 육수에 된장을 풀었다. 된장은 한 번에 풀지 않고 국물에 살살 개어 넣었다. 감자와 애호박을 적당히 썰어 넣고, 양파를 한 번에 다 넣지 않고 두 번에 나눠 단맛의 층을 만들었다. 마지막에 두부와 청양고추, 마늘을 넣자 구수함 속에 푸릇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시금치는 소금물에 살짝 데쳐 찬물에 헹군 뒤 손으로 물기를 꼭 짰다. 들기름 한 방울, 간장 한 방울, 마늘을 미세하게 다져 소금의 모난 입자를 감쌌다. 무생채는 칼날을 세워 길이를 맞추고 고춧가루와 식초를 넣어 입맛을 깨웠다. 참깨를 비벼 넣으니 손끝에서 고소한 기름이 스며 나왔다.

시곗바늘이 한 번, 두 번 돌아가는 사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선풍기는 일정한 박자로 공기를 갈라냈고, 빈 의자들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준비는 끝났는데 첫 발걸음은 오지 않았다. 진안은 주방과 홀 사이를 몇 번 왕복하다가 결국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햇살이 이마에 얇게 내려앉았다. “제발 누구라도…” 마음속에서 소리가 흘렀다.

그때, 진안의 바람이 닿았는지 저 멀리 한 그림자가 언덕 끝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아주 마른 실루엣. 발걸음이 느리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가까워질수록 얼굴의 주름이 더 또렷해졌다. 칼날 같은 눈매, 입술선이 아래로 깊게 내려간 입가, 머리칼은 희끗했고, 햇빛 아래서도 허리가 한 번도 펴지지 않은 사람의 곡선.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시간의 주인이었다.

진안은 앞치마에 손을 한 번 털고 성큼 다가갔다.

“어르신, 어서오세요.”

그녀는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짧고 정확한 시선이었다.

“자네가 도하리에 식당을 열었다고?”

“네, 어르신. 서연정이라고 밥집입니다.”

“그럼 내가 맛을 한 번 봐야지.”

진안이 부축을 내밀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팡이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듯, 발걸음을 또박또박 옮겼다. 홀 의자에 앉자마자, 그녀는 심사위원처럼 주변을 훑었다. 천장의 선풍기, 닦은 흔적이 반짝이는 창틀, 구석에 말리고 있는 걸레, 반쯤 벗겨놓은 ‘서연정’ 간판. 고개가 아주 조금 끄덕여졌다가 멎었다.

“여긴 뭐 파는지도 안 쓰여 있나?”

그녀가 물었다.

“그때마다 다른 것을 팝니다, 어르신. 오늘은 보리밥하고 된장찌개, 그리고 나물 몇 가지예요. 어떠세요?”

“그때마다 다른 걸 판다고?”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이것도 서울서 유행한다는 그거냐. 보여주기 좋고, 배는 허전한.”

진안은 기가 죽지 않았다. 웃음이 먼저 앞섰다.

“보여드릴게요. 배가 먼저 든든해야 말도 나오니까요.”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 국자를 들었다. 된장찌개는 이미 보글보글 숨을 고르며 기포를 터뜨리고 있었다. 된장이 풀어낸 깊은 갈색 국물 위로 호박과 감자가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두부는 하얗게 빛을 머금은 채 은근하게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파를 송송 썰어 넣자, 찌개 속에서 초록빛이 퍼지며 구수한 향이 한 번 더 확 끓어올랐다.

옆에서는 보리밥이 뜸을 다 마친 채 솥뚜껑을 두드리고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하얀 수증기가 후욱 얼굴을 감쌌다. 김 사이로 퍼져 나오는 보리의 향은 고소하고 담백해, 그 한 그릇이 이미 밥상이 될 것만 같았다.

진안은 밥을 조심스레 퍼 담고, 작은 접시에 시금치나물을 고르게 펼쳤다. 소금에 살짝 간한 뒤 참기름이 은근히 밴 시금치는 녹색의 결마다 반짝거렸다. 무생채는 붉게 물들어 아삭아삭 살아 있었고, 오이무침은 초록빛 결마다 고춧가루가 매혹적으로 얹혀 있었다. 반찬들이 가지런히 자리잡자 마치 여름 밭 한쪽을 그대로 옮겨온 듯 싱그러움이 차려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면보로 반찬 접시의 물기 자국을 훑어내듯 닦았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깨끗한 수건으로 한 번 더 훑어 윤을 냈다. 쟁반 위에 올려놓는 순간, 소박하지만 정갈한 한 상이 완성되었다.

진안이 쟁반을 들고 나오는 동안, 할머니는 냄새에 먼저 반응했다.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보리 냄새네.” 혼잣말처럼 흘렀다. 빈속이든, 기억이든. 둘 중 하나가 소리를 냈다.

그는 상을 내리고 조용히 물었다.

“입맛 없으시면 밥에 보리 비율을 낮출 수도 있어요. 어르신 드시기 편하게.”

“그냥 줘.”

할머니는 숟가락을 들었다. 된장찌개를 먼저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혀끝이 잠깐 멈추고, 눈이 아래로 향했다. 감자의 분이 혀에서 부서지고, 애호박의 단물이 된장과 섞여 목을 탔다. 멸치의 등뼈 맛이 아주 멀리서 받쳐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엔 보리밥을 한 숟가락 떠, 나물과 함께 입에 넣었다. 보리가 치아 사이에서 또각거리고, 참기름이 혀를 타고 돌았다. 무생채의 산기가 살짝 올라오는 순간, 그녀의 목젖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녀의 눈빛에서 경계가 한 겹 벗겨졌다. 숟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한 숟, 두 숟…. 된장 국물과 보리밥이 같은 속도로 줄어들었다.

“가난하게 살면서 질리도록 먹은 게 보리밥이야.”

그녀가 처음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낮은데 멀리 갔다 오는 소리였다.

“더는 먹기 싫을 정도로. 헌데….”

그녀는 말을 끊고 밥을 한 숟갈 더 떠 넣었다.

“자네 건 먹을만 하구만.”

진안은 숨을 조금 늦게 내쉬었다. 그가 준비한 모든 자잘한 손질들이-양파를 두 번에 나눠 넣은 것, 시금치의 물기를 꼭 짠 것, 된장을 한 번에 풀지 않은 것-그녀의 목울대를 통과해 지금 이 한 마디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할머니는 작은 체구로는 믿기지 않게 그릇을 바닥까지 긁어먹었다. 된장찌개 그릇의 테두리에 남은 점 한 방울까지 숟가락으로 모아 입에 넣었다. 마지막 한 숟갈을 삼킨 뒤에야 그녀는 물을 마셨다. 손등에 있는 세월 짙은 검은 점들이 물빛 아래 반짝였다.

계산을 마치고 일어서는 그녀를 진안이 배웅했다. 바깥 공기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녀는 문턱 앞에서 발을 잠깐 멈추고 뒤를 힐끗 보았다. 선풍기 소리, 닦아놓은 유리, 햇빛이 기울며 만드는 긴 그림자. 아까와는 다른 눈길이었다. 밥 냄새가 이 집의 살결을 만든 것처럼.

“내가 여기 토박이 중 토박이야.”

진안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가 말했다.

“나보다 오래 산 사람 없어. 가게 홍보를 시키려면 그 튼실한 총각 말고 나한테 맡겼어야 해. 하긴, 부실한 남자 둘이서 뭘 하겠냐만.”

진안은 웃음을 삼켰다.

“제가 지혜가 없었네요. 그래도, 밥은 맛있으셨죠?”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지팡이를 바닥에 탁, 한 번 찍었다. 동의의 소리처럼 들렸다.

“정 할매.”

그녀가 불렀다.

“예?”

진안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정 할매라고 불러. 여기선 다 나를 그렇게 불러.”

“저는 김진안입니다.”

“니 이름은 관심 없고.”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랐다. 진안은 소리 내 웃었다. 무심한 척하지만, 이미 마음 한쪽을 내준 사람의 태도였다.

그녀가 언덕 위로 사라질 때까지 진안은 문가에서 서 있었다. 바람이 밥 냄새와 함께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는 주방으로 돌아와 빈 그릇을 들고 잠깐 서 있었다. ‘처음 손님’이라는 말이 이를 수 있는 모든 의미가 그 그릇 무게에 실려 있었다. 처음으로 밥을 내고, 처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처음으로 이 집이 ‘집’이 되는 순간.

해가 기울고, 광운이 돌아왔다. 팔에 실리콘 자국이 남아 있었고, 셔츠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어땠어?”

광운이 물었다. 진안은 싱크대에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 분. 심사위원.”

광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누군데.”

“정 할매.”

진안은 웃었다.

“배고픈 심사위원은 무서운데, 배부른 심사위원은 든든하더라.”

그날 밤, 문을 닫고 불을 끄기 전에, 진안은 일상처럼 일기장을 꺼냈다. 펜 끝이 종이를 살짝 긁었다.


6월 어느 여름날.

보리밥에 된장, 시금치와 무생채.

지팡이를 짚은 작은 어른이 오셨다.


처음 냄새에 눈썹이 떨렸고,

첫 숟가락에 숨이 멈췄다가,

두 번째 숟가락에 오래된 주름 사이로 빛이 났다.


“먹을만 하구만.” 여섯 글자에

하루가 다 들어 있었다.


서연정은 오늘 처음

사람의 체온을 얻었다.

밥 냄새가 벽에 배어 간다.

내일은 더 구수하게.


도하리의 밤이 내려앉았다. 멀리 개가 한 번 짖고, 논물 위로 벌레 소리가 퍼졌다. 진안은 펜을 내려놓고, 어둠 속에서 주방을 생각했다. 내일도 보리밥일지, 아니면 여린 오이를 첫 손님에게 건넬지. 정 할매가 다음엔 누구를 데려올지. 그는 눈을 감았다. 맛이 먼저 떠오르고, 얼굴이 그다음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 집의 이름이 낮게 빛났다. 서연정. 잠시 머물다 가도 괜찮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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