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차가 줄었다. 신호등이 사라지고, 빌딩이 낮아지고, 고속도로의 바람이 좁은 지방도의 바람으로 바뀔 때쯤, 라디오를 껐다. 창문을 조금 더 내리자 초여름 냄새가 차 안으로 쏟아졌다. 풀과 흙, 물을 머금은 바람의 냄새. 진안은 악셀에서 발을 조금 떼며 속도를 낮췄다. 도로 옆을 스쳐가는 건 물푸레 같은 초록의 담벼락, 칠흑 같은 밭고랑, 누군가 방금 물을 준 듯 반짝이는 모종들,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비닐하우스 지붕의 은빛이었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는 날들, 햇살이 아직 설익은 감처럼 풋풋한 계절. 차창 너머로 산의 등줄기가 겹겹이 누워 있고, 그 사이사이에 논이 빛을 깔아 수면처럼 흔들렸다. 길가의 작은 버스 정류장엔 누구도 없었고, 전봇대에 묶인 깃발이 바람에 한 번씩 살을 뒤집었다. 강이 나타났다. 넓지는 않지만 흐름이 분명한 물, 둔치에 흰 백로 두 마리가 느릿느릿 걸었다. 진안은 브레이크를 밟고 다리에 올랐다. 강 위에서 한 번 숨을 쉬었다. 강물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다리가 끝나자 나무 간판이 나왔다. 흰 바탕에 먹으로 쓴 듯한 서체, ‘도하리’. 강을 건너면 도하리, 라는 말이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있을까. 그는 간판을 지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하리.” 입안에서 소리가 한 번 둥글게 굴러 나왔다. 낯설고도 익숙한 소리였다. 오래전 어디선가 들은 듯, 아니면 미래의 어느 날 계속 부르게 될 이름처럼.
마을은 온통 초록이었다. 밭과 논이 서로의 초록을 부추기듯 붙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좁은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마을회관 앞 평상엔 노인 몇이 앉아 느린 박자로 바람을 부채질했고, ‘노인정’이라고 적힌 양철 간판은 햇빛을 받아 빛났다. 읍내는 차로 십 분 남짓 거리지만 걸어서 돌면 두 시간은 걸릴 만큼 작고, 그래서인지 여기선 시간이 조금 더 천천히 흘렀다. 진안은 속도를 더 낮춰, 초록 사이로 길을 파고들었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이층집 앞에 차를 댔다. 콘크리트 마당의 물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걸 보니 페인트를 칠한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갈색 박공지붕에 크림색 외벽, 1층에는 작은 유리문과 목재 프레임의 창이 연달아 나 있었고, 그 옆 벽에 ‘서연정’이라는 세 글자가 인쇄된 작은 간판이 종이와 비닐로 반쯤 감싸인 채 기대어 있었다. 아직 벽에 못을 박지 않아 간판은 바닥 그림자 속에 누워 있었다. 뒷마당으로 시선을 돌리자 비닐이 반쯤 깔린 직사각형의 텃밭이 있었다. 고랑은 곧고, 흙은 잘 고와져 있었다. 아직 심을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들.
차에서 내린 진안의 얼굴엔 불평이 없었다. 오히려 먼 길을 달려온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도시에선 한 번도 맡지 못한 냄새가 폐 안을 쓱 씻고 지나갔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길게 다가왔다. 낯설지 않은 사람의 걸음.
광운이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뒤틀림 없이 반듯했고, 팔뚝은 여름의 햇빛을 오래 받아 단단한 색을 띠고 있었다. 소매를 팔꿈치 위로 돌돌 말아 올렸고, 목에는 흰 수건을 걸었다. 수건 끝은 땀에 젖어 누렇게 색이 비쳤다. 그가 한 번 더 가까이 오자, 진안은 그의 손등에 박힌 작은 흉터들과, 손바닥의 오래된 굳은살을 보았다. 공장, 쇳소리, 뜨거운 모서리들. 말수를 아껴두는 사람의 입술. 그의 눈은 짙은 숲처럼 깊었고, 빛을 오래 머금고서야 돌려주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늦었네.”
광운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말끝이 멎어 있었다. 진안은 집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여기 경치는 언제 봐도 멋지니까.”
“짐은? 저거뿐이야?”
“설마.”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남은 짐은 내일 아침 트럭으로 올 거야. 설마 벌써 쉬려는 건 아니지?”
광운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움직였다. 웃음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러나 분명 미세한 온도 변화.
“어차피 이제부터 일 시작이잖아. 날 고용한 건 너니까.”
“고용? 동업이지.”
진안은 장난스럽게 광운의 어깨를 툭 쳤다. 딱딱한 근육의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1층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새 목재 냄새와 페인트의 희미한 자극이 뒤섞여 올라왔다. 주방은 크지 않았다. 대신 동선이 곱게 정리되어 있었다. 싱크대와 조리대, 가스레인지가 ㄷ자로 감싸고, 작은 창이 조리대 앞에 있었다. 창문을 열자 마당에서 바람이 들어와 스테인리스를 한번 쓰다듬고 지나갔다. 벽 한쪽에는 선반을 걸 자리만 표시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엔 작은 칠판을 달기로 한 자리에 못이 두 개 박혀 있었다. 조리대 모서리를 손등으로 쓸며 진안이 속으로 말했다.
‘여기가 내 자리.’
문 옆에 기대어 있던 간판에서 비닐을 조금 벗겼다. 하얀 바탕 위에 검은 획.
‘서연정’-서로의 인연을 풀어내는 집.
할머니가 생전에 소곤대듯 말하던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 벌이는 적더라도 오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제영아. 밥은 대충이 제일 비싸.
그는 간판을 다시 조심스럽게 감싸놓고 주방을 한 바퀴 더 돌았다. 수도의 물줄기는 맑았고, 가스 밸브는 아직 봉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목재 계단이 아주 천천히 소리를 냈다. 2층 복도는 좁지만 창이 길게 나 있어 낮의 빛을 넉넉히 끌어들였다. 오른쪽 방은 조금 크고, 왼쪽 방은 아담했다. 거실은 작은 소파 하나 놓으면 꽉 찰 정도였고, 끝에 붙은 미니 주방은 물 한 잔 끓이기에 적당해 보였다. 화장실 문은 무광 회색으로 칠해져 있어 새것 냄새가 났다.
“내가 이쪽 방. 네가 저쪽 방. 거실은 보시다시피, 주방은 넓지 않게. 화장실은 저기.”
광운이 짧게 설명했다.
“이제는 고치고 싶어도 못 고쳐.”
“고칠 것도 없는데?”
진안은 방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완벽해서.”
그는 배낭의 지퍼를 열고, 낡은 액자 하나를 꺼냈다. 흑백에 가까운 색감, 어린 진안과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 배경은 오래된 연탄광이었다. 할머니의 손이 그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그는 그 사진을 방 책장 맨 위 칸에 올려두었다. 둘의 얼굴이 딱 들어오는 자리. 잠깐 침묵. 진안은 사진을 한 번 더 보고, 혼자 알아듣게 웃었다.
‘왔어요.’
배가 고팠다. 허기가 슬금슬금 올라오는 시간이었다. 진안이 복도로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은 아직 주방 용품이 안 와서, 그때처럼 밥은 못 해주고…. 대신 사줄 수는 있는데. 도하리 선배가 메뉴 고르시죠?”
광운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에 ‘중국집’이라고만 적힌 번호. 신호음이 가면서 광운이 말했다.
“이삿날은 자장면 아닌가?”
“완전 좋지. 나 기스면!”
광운은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취향 한 번 이상하다니까.”
주문을 끝내고 그는 다시 소매를 더 걷어붙였다. 아직 못 박을 데가 몇 군데 남아 있었고, 창틀 실리콘을 한 번 더 다듬어야 했다.
“밥 올 때까지 밖 좀 보고 있어. 텃밭은 네가 할 거잖아.”
진안은 마당으로 나갔다. 햇빛이 아직 따갑지 않았고, 바람은 오전에 비해 약간 눅눅해져 있었다. 텃밭의 흙을 손가락으로 집어 보았다. 물 좋아하고 열 좋아하는 토마토 자리, 옆에는 가지, 고추. 가장자리는 상추랑 깻잎으로 돌리고, 뒷줄에는 오이와 애호박을 심어 넝쿨을 세우자. 토마토는 방울로 몇 주, 대과로 몇 주. 가지는 보라색 광택이 도는 종자로, 첫 수확은 가볍게 구워 간장과 마늘, 식초를 섞어 ‘가지무침’을 만들자. 점심 메뉴로는 오이냉국과 보리비빔. 여름에는 보리가 밥보다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저녁엔 된장의 진을 조금 빼서 풋고추랑 비벼 먹는 ‘된장보리밥’. 소박하지만 오래 배부른 밥상.
“아이고, 할 일이 많겠다.”
그는 소리 내어 말했다. 할 일이 많다는 말이 이상하게 좋았다. 무언가를 짓고 키우는 동안엔 생각이 건강해진다. 누가 가장 첫 손님이 될까. 마을회관의 아저씨들? 노인정의 할머니들? 아니면 길 잃은 여행자 한 명? 상상은 곧 메뉴의 순서가 되었고, 메뉴는 다시 누군가의 표정을 떠올리게 했다.
오토바이 배달원이 먼지와 함께 들어왔다. 커다란 짜장면 하나와 기스면 하나. 그들은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테이블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겹겹이 쌓인 비닐을 젓가락으로 찔러 향을 흘려보냈다. 춘장의 짭짤한 냄새가 방을 채웠다. 광운은 자장면 곱빼기를, 진안은 기스면을 들었다. 맑은 국물 위에 떠 있는 지단과 닭결의 부드러움이 혀를 잠시 어루만졌다.
“이런 날은 괜찮네.”
광운이 말했다.
“응? 무슨 날?”
진안이 면을 후루룩 삼키며 물었다.
“아무 일도 시작하지 않은 날. 시작하기 직전의 날.”
그는 젓가락을 잠시 멈추고, 창밖의 텃밭을 보았다. 눈빛에 짧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사라졌다.
그날 오후, 그들은 말없이 각자의 일을 했다. 광운은 망치로 못을 박고, 실리콘을 매만지고, 선반을 달았다. 나사가 단단히 물릴 때마다 그의 손등의 혈관이 살짝 도드라졌다. 진안은 주방을 한 칸씩 닦았다. 스펀지를 문지를 때마다 페인트 가루와 먼지가 흰 거품 사이로 사라졌다. 가스렌지 옆의 기름받이, 싱크대의 배수망, 냉장고 내부의 유리 선반까지. 그는 하나하나 손을 대며 마음속으로 하루의 순서를 짰다. 새벽 장보기, 아침 된장국, 점심 보리비빔, 오후 아이스크림을 사러 오는 아이들, 저녁의 소박한 전과 막걸리 한 잔. 주방이 조금씩 자신의 체온을 배워가는 느낌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광운이 오토바이를 끌어 읍내 슈퍼로 내려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캔맥주와 얼음, 그리고 소시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당의 플라스틱 상자를 뒤집어 테이블로 삼고, 그 위에 캔을 올려놓았다. 철컥, 철컥. 두 캔이 동시에 열렸다.
“수고했어.”
그가 말했다.
“내일부터가 진짜지.”
진안이 맥주를 들었다. 쌉쌀한 거품이 입천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름의 시작과 맥주의 시작은 언제나 타이밍이 맞았다. 둘의 말은 짧았고, 침묵은 낯설지 않았다. 먼 데서 개구리 울음이 들렸다. 하늘이 천천히 파랗게 식으며 하나둘 별이 떠올랐다.
밤이 깊어져 가며 그들은 쓰레기 봉투를 묶고, 공구를 정리하고, 걸레를 빨아 널었다. 마지막으로 주방 불을 끄며 진안은 잠깐 서 있었다.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주방의 윤곽을 본다. 싱크대, 조리대, 선반, 창가의 실루엣. 여기가 이제 그의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 곳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그는 책장에서 사진을 내려 손바닥으로 한 번 닦았다. 할머니의 웃음이 거기 있었다. 두 주름 사이에 끼어 있는 온기. 그는 사진을 다시 올려두고 창가에 섰다. 도하리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훨씬 느리게 흘렀다. 바람이 커튼을 살짝 밀어 올렸다.
‘할머니, 저 결국 돌고 돌아 도하리로 왔어요. 잘해보려고요. 저를 지켜주세요.’
말은 목구멍을 지나 소리 없이 밖으로 흘렀다. 그 순간, 별 하나가 유독 크게 반짝였다. 우연이라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닫으며, 마음속에 간판 하나가 켜졌다. 강을 건너면 도하리가 있고, 도하리엔 서연정이 있다. 그리고 내일이면, 그 문이 첫 손님에게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