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아침 일찍 도하리 면사무소의 셔터가 올라갈 때, 철호는 늘 가장 먼저 들어갔다. 손에 들린 열쇠 묶음이 또르르 소리를 냈고, 현관 센서등이 잠깐 깜빡였다. 문을 열자마자 맡는 냄새는 늘 같았다. 축축한 종이와 오래된 서류철에서 배어 나온 잉크 냄새, 복도 바닥에 올라앉은 걸레 비눗물 냄새, 그리고 커다란 선풍기 모터에서 풍기는 약간의 금속 냄새. 사무실 한쪽 벽에는 지난달 행사 배너가 말아 놓인 채 끈으로 묶여 있었고, 달력에는 붉은 동그라미가 몇 개 박혀 있었다. ‘경로당 보일러 점검’, ‘마을 합동 방제’, ‘읍내 체육대회 예선’.
철호는 커피포트를 올리고 PC 전원을 켰다. 모니터 불이 들어오자마자 붙여놓은 스티커들이 얼핏얼핏 눈에 걸렸다. ‘어르신께는 두 번 더 설명하기’, ‘급해도 천천히’, ‘전화는 3번 울리기 전에’. 창문을 반쯤 열자 좁은 마당의 느티나무 잎이 바람에 닿아 파르르 떨었다. 벽시계 초침이 “딱-딱-” 리듬을 잡기 시작하는 시간, 현관 쪽에서 지팡이 끝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철호 있나?”
문턱에서 정 할매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예, 할머니. 여기요.”
“버스 시간표 좀 보자. 내가 시내 병원 갈 일이 있어서.”
철호는 서랍에서 접어 둔 시간표를 꺼내고, 손바닥만 한 종이에 ‘도하리-읍내’ 중간 정차 시간을 크게 손글씨로 적었다.
“아침 9시 10분, 10시 40분. 할머니는 10시 40분 타셔도 시간 넉넉해요. 병원은 예약이 12시죠?”
“맞다, 맞다. 이 총각은 참말로 기억력이 좋아.”
정 할매가 손뼉을 두 번 치며 웃었다.
“근데 너는 언제 장가가니?”
“할머니, 그 얘기 또….”
“또 듣고 또 해도 질리지가 않아서 하는 소리다.”
정 할매가 까르르 웃고 돌아서니, 이번엔 농사 보조금 신청서 든 아재가 들어왔다. 다음은 친족관계 증명서를 떼러 온 아주머니, 그 다음은 도배·장판 지원 대상 문의하러 온 이웃. 오전은 늘 그랬다. 무언가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철호는 낡은 톱니들 사이에 들어가는 기름 같은 역할을 했다. 빠릿빠릿하지 않지만, 꾸준하고, 미끄럽고, 오래 가는.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나면 오후엔 행사 준비를 했다. 내일은 면 주관으로 작은 기념식이 있었다. 현수막을 펼쳐 보고,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앰프 스위치를 몇 번 눌러 보았다. 얇은 먼지가 앰프 격자에 쌓여 있어 손톱으로 살짝 쓸어냈다. ‘지직—’ 소리가 나더니 스피커에서 낮은 웅음이 흘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철호는 자신도 모르게 서연정을 떠올렸다.
며칠 전부터 면사무소 사람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진 소문.
“도하리에 밥 잘하는 데 생겼다더라. 밥이 단단하고 국이 깊다더라. 거기 총각, 말도 싹싹하더라.”
처음엔 흘려들었다. 그런데 누군가 한 번, 또 한 번 얘기하니 어느 저녁, 퇴근길을 틀어 서연정 간판 앞에 섰다. 같은 면에서 태어나, 같은 면에서 늙어갈 생각을 한 사람에게도 새로운 길은 있는 법이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 주방에서 나던 냄새를 철호는 정확히 기억했다. 기름 냄새가 아니었다. 불맛도 아니었다. 약간의 장 냄새와, 삶은 채소의 연기. 눈앞에 놓인 막걸리 한 사발과, 지글지글 갓 부친 파전. “한 잔 하고 가세요.”라는 말보다 “수고하셨어요.” 하는 진안의 말이 더 먼저였다. 그 뒤로 철호는 종종, 혼자서, 조용히, 서연정을 찾았다. 막걸리는 늘 차갑고, 파전은 가장자리가 바삭했고, 진안은 적당히 말이 있었다.
“내일 면에서 행사가 있는 것 같은데, 바쁘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왔습니다. 이거 먹고 힘내야죠.”
그게 작은 루틴이 되었다. 막걸리 한 잔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 하루가 온전히 끝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서연정 한쪽 진열장에 놓인 레드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라벨에 익숙지 않은 외국어가 적혀 있고, 병목에 얇은 금박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TV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흰 식탁보, 은빛 식기, 고급스러운 조명 아래서 스테이크를 칼로 써는 사람들, 붉은 잔을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는 사람들. 웃고 떠드는 그들의 담장 너머를 한 번쯤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철호는 아주 오래전부터-아마 젊은 날 잠깐 읍내 영화관에서 본 멜로의 한 장면 이후-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묻지 못했다. 가끔 잔을 닦는 진안의 손끝을 보며 목까지 올라오는 질문을 몇 번 다시 삼켰다. 이런 거 마실 줄 모르는데, 나 같은 촌사람이….
사건은 뜻밖에, 더운 오후에 벌어졌다. 그날은 햇빛이 무겁게 내려앉아 면사무소 지붕 위에서 조롱조롱 여름벌레 소리가 내려오는 날이었다. 복도 끝 가림막 너머에서 웅성거림이 났다. 민원실 문이 벌컥 열리며 키 큰 남자가 들어왔다. 군청 냉방 조끼를 연상시키는 파란 조끼를 입고, 모자는 뒤로 젖히고, 얼굴은 술기운인지 더위 때문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쌍! 면장 나오라고 해!”
무턱대고 던지는 소리에 창가에 앉아있던 어르신들이 움찔했다.
“아이, 선생님. 진정하세요.”
젊은 여직원이 천천히 일어섰다.
“진정? 누가 진정을 하래! 내 돈을 떼먹었어! 직불금이 왜 깎여! 지난번이랑 기준이 똑같은데!”
남자의 손에 접힌 서류가 있었고, 모서리는 이미 손에 땀이 배어 젖어 있었다. ‘농업직불금 신청서/지급조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무슨 일인지 제가 먼저 설명을 들어볼게요.”
“네가 담당이야?!”
“네, 저희 면에서는 선생님 댁 건 제가 보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책임져! 내 땅만 왜 쏙 빼고 계산했냐고!”
“올해부터 재배 확인이 조금 더 엄격해졌어요. 현장 확인에서 작업일지와 사진이….”
“사진? 사진은 또 뭔데! 나는 사는 게 바빠서 사진 같은 거 못 찍어! 내가 농사 안 지은 것도 아닌데!”
“그런데 위성 사진에도…. 올해 초에는 논에 물이 늦게 들어가고, 또,”
“위성? 하! 너희는 하늘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 씨발, 하늘이 밥을 줘? 사람 말을 들어야지! 면장이 어딨어! 면장 좀 나와봐!”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기표 받던 어르신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려 하자, 옆에서 다른 이가 팔을 붙잡았다. 누군가는 기자재실에 있던 기성품 푯말 ‘민원대응 중, 잠시만요’를 꺼내 카운터 앞에 세웠다. 공기는 단단해졌고, 더위는 실내로 들어와 맴돌았다.
“선생님, 면장님은 지금 군청 회의 중이세요. 제가 전화를 넣어볼게요. 대신….”
“대신? 대신? 너, 나 무시하냐? 네가 뭔데 대신이야!”
남자가 카운터를 ‘쾅’ 내리쳤다. 플라스틱 펜꽂이가 넘어지며 펜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철호는 반사적으로 펜을 줍다가, 손등으로 떨어진 공무원증을 주워 단정히 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낮추고,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폭언은 안 됩니다. 저희가 확인을 더 해보고, 부족한 부분은 추가로 도울 수 있어요. 현장 사진이 어려우시면,”
“이 새끼가 지가 법이야? 미친놈이! 네가 뭔데 내 돈을 깎아! 우리 집 올해 농사도 망쳐서 사람 불러다 싹다 갈아엎었는데, 그걸 네가 알아?!”
다음 순간 일어난 일은, 너무 빨라서 기억이 잘리지 않았다. 남자의 팔이 쓸어 올라오며 철호의 뺨을 세게 쳤고, 귓속에서 하얀 소리가 “쉬-” 하고 퍼졌다. 몸이 뒤로 밀리며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길게 났다. 왼쪽 눈 위가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112를 눌렀다. 남자는 여전히 욕을 퍼부었지만, 그 소리는 물속에서 나는 것처럼 둔탁하게 들렸다.
몇 분 뒤 경찰이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미 밖으로 나와 주차장 그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경찰이 그를 진정시키고 신원 확인을 하는 사이, 동료가 얼음주머니를 건네며 철호의 이마 위를 조심히 눌렀다. 얼음이 닿자 비로소, 통증이 ‘아, 아-’ 하고 확실한 목소리를 냈다.
“고소하실 수 있습니다. 일단은 폭행이니까.”
철호에게 다가온 경찰이 물었다. 철호는 얼음주머니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놓았다.
“아니요.”
“그래도….”
“같은 동네 사람입니다.”
“그건 별개고요.”
철호는 고개를 저었다.
“신청 기준도 바뀌고, 그분도 사정이 있는 거겠죠.”
그러나 마음속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쓴맛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억울함과 분노가 아니라, ‘내가 못해준 게 있을까?’ 하는 바보 같은 자책. 그는 늘 그렇게 흘러가도록 배웠다. 민원대응 매뉴얼의 첫 줄, ‘모욕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하지만 사람 마음은 매뉴얼을 모른 척할 때가 더 많았다.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리고, 열쇠를 돌리는 동안 저녁 바람이 조금씩 불어왔다. 도하리의 길은 낮에 달궈진 열을 천천히 내뿜었다. 먼 데서 개가 두세 번 짖었고, 개울가에서는 물이 돌 틈에 부딪히는 소리가 은근하게 났다. 느티나무 잎새 사이로 붉은 저녁이 묻어 있었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걷고 싶었다. 냄새와 소리와 열기가 몸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그런데 발길은 자연스레 서연정으로 향했다. 간판 글씨 ‘서연정’이 노을을 받아 따뜻하게 빛났다. 문을 열며 살짝 종이 울렸다.
진안이 물수건을 접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철호 씨. 무슨 일이에요?”
철호가
“하, 그냥요.”
하고 웃으려 했지만, 웃음은 왼쪽 눈 주위의 통증에 깎여 나갔다. 멍이 금세 퍼지고 있었다.
“저, 와인 하나만…. 살 수 있나요? 오늘따라 저기 진열 되어있는 와인이 너무 마시고 싶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어색했다. 제 몸의 어색함, 입에서 나오는 말의 낯섦. 진열장 유리 너머의 붉은 병이 이상하게 가까워 보였다.
진안은 철호가 그 병을 자주 힐끗 보던 것을 알고 있었다. 자랑하려고 가져온 술도 아니었고, 비싼 취향을 드러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언젠가 좋은 날 한 병을 열어 누군가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좋은 날까지 기다리자는 생각을, 진안은 오늘 접었다.
“안주는 뭐든 상관없다면, 내어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예.”
철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진안이 주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팬이 달아오르고, 다진 마늘이 먼저 올라갔다. 포도씨유가 아닌 들기름 한 방울과, 기름이 무르익는 소리. 얇게 저민 돼지고기를 고추장과 살짝 볶아 단맛을 끌어내고, 양파와 애호박, 감자를 차례로 투하했다. 멸치육수를 부어 붉은 고추장 속에서 맑음을 만들어냈다. 간장 몇 방울로 소금을 줄이고, 청양고추는 씨를 털어 매운 끝맛만 남겼다. 주방에는 매콤하면서도 기분 좋은 달큰함이 가득 찼다.
그 사이 진열장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몸집이 크지 않은, 색이 너무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붉음. 병마개에 코르크 스크류를 박아 조용히 당기니 “폭-” 하고 안쪽 공기가 가볍게 터졌다. 와인잔을 꺼내 뜨거운 물로 한 번 헹굴까 하다가, 오늘은 그럴 것 없이 깨끗한 천으로 닦아 윤을 냈다. 잔에 와인이 얇은 줄기로 흘러내리자 유리벽을 타고 붉은 물결이 한 겹 얇게 돌았다. 진안은 잔을 철호 앞에 밀어 놓았다.
“저는…. 사실 이런 거 마실 줄 모릅니다.”
철호가 중얼거렸다.
“마시는 법이 따로 있는 술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안이 웃었다.
“그저, 입맛에 맞게 즐기는 것뿐.”
철호는 잔을 들었다. 멍든 왼쪽 눈 아래 붉은 반점과 잔 속 붉음이 잠깐 겹쳐 보였다. 그는 향을 맡지 않았다. 그냥 입에 조금 머금었다. 알코올이 혀끝을 스치고, 붉은 과일 같은 느낌이 가볍게 지나갔다. 생각했던 쌉싸래함이 아니라, 낯선 부드러움이 먼저 왔다. 익숙하지 않은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걸, 혀가 먼저 이해했다.
“저는 역시 촌놈이라…. 막걸리가 더 입에 맞네요.”
그는 솔직해졌다.
“이제부터 맛 들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진안이 말했다.
“원하시면, 사다 놓을게요. 이번에는 기쁜 날 마실 수 있게.”
“… 감사, 합니다.”
철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고추장 찌개가 탁자 위에 내려왔다. 대충 끓인 찌개가 아니었다. 기름이 과하지 않고, 국물이 붉지만 탁하지 않았다. 감자는 모서리가 무르지 않게, 애호박은 초록을 잃지 않게, 돼지고기는 얇게도 두껍게도 아닌 한 끗으로. 철호가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맵지 않았다. 달았다. 아니, 매콤한데 달았다. 단데 쇠 맛이 아니었다. 고추장 발효에서 나는 쿰쿰함과 멸치육수의 감칠맛이 와인의 씁쓸함과 어딘가 맞물렸다. 이상하게 와인이 ‘입가심’처럼 느껴졌다. 찌개 한 숟가락, 와인 한 모금, 다시 찌개. 입안에 생긴 작은 맥락이 마음속 넝쿨과 닮았다. 매뉴얼로 정리할 수 없는 어떤 위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진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 그냥, 좀.”
“괜찮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철호는 숟가락을 한 번 접시에 내려놓았다. 어쩌면 말하고 싶어서 여기 온 것인지도 몰랐다.
“민원인 한 분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올해부터 기준이 바뀌고, 그분도 사정이 있고…. 근데 저는, 하여튼….”
그는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사람에게는, 침묵이 말의 끝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쉼표일 때가 많았다.
“고소하라 하더군요.”
“네.”
“안 했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우리 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철호는 자신을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지해서 그런가? 순진해서? 아니면, 그래야 내 마음이 덜 쓰라리나?
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비웠다.
“그럼 오늘 와인은, 그 결심을 위하여.”
“결심?”
“다음에 좋은 날 마실 와인을 위해서, 오늘은 위로의 와인.”
진안의 위로에 철호가 조금 웃었다. 멍든 눈 밑 주름이 잠깐 흔들렸다.
찌개 냄새가 서연정 안에 가득했다. 밖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시작되었고, 마당 텃밭의 고랑에서는 흙이 냄새를 올렸다. 광운이 홀의 조명을 하나 둘 낮추고, 물병을 채워 카운터에 올렸다. 말이 많지 않은 광운도, 오늘은 철호의 잔을 한번 미세하게 가리키며 눈으로 “천천히” 했다.
철호는 천천히, 오늘의 고단함을 생소한 조합으로 녹였다. 와인 잔에 남은 붉은 선이 점점 얇아졌다. 마지막 한 모금이 남았을 때, 그는 잔을 들고 유리창 너머 어두워진 들을 흘깃 보았다. 저곳 어디쯤, 그의 마음에 오래 앉아 있는 누군가의 집도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말할 수 없어도, 그 마음이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 분명했다.
“서연정이…. 오래, 오래 문을 열었으면 좋겠네요.”
그의 말은 단순했지만, 진심이었다. 밥을 파는 집이 아니라 마음을 덥히는 집으로 오래 남아달라는 부탁.
“최고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진안은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그리고 자리를 조심히 비켜주었다. 사람이 혼자 앉아있어야 비로소 풀리는 마음도 있으니까.
간판 불이 내려가고, 가게 안의 소리들이 하나둘 씻겼다. 설거지 물소리, 그릇 포개지는 소리, 젖은 수건이 물을 짜내는 소리. 마지막으로 주방 등 하나가 ‘딸깍’ 꺼질 때, 창밖의 벌레 울음이 더 크게 들렸다. 철호는 계산대에 돈을 놓고, 잔을 한번 바라본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여닫는 종이 짧게 울렸다.
밖의 공기는 낮의 열기를 아직 품고 있었다. 여름은 이렇게 뜨겁게 지나가야 여름 같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그는 문간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어둑한 길을 걸었다. 하루치의 모욕이 아니라 하루치의 일을 견딘 사람의 걸음으로. 눈 밑의 멍은 내일 더 선명해질 것이다. 하지만 붉은 잔에서 배운 약간의 달큰함도, 내일 그의 혀끝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날 밤, 진안은 주방을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와 일기장을 펼쳤다. 손끝에 고추장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잔에 비친 붉은 물이 잠깐 철호의 멍과 겹쳐 보였던 순간을 떠올리며, 펜을 눌렀다.
오늘, 한 잔의 붉음이
누군가의 멍과 닮아 있었다.
쓴맛을 달게 만드는 건
설탕이 아니라
곁에서 끓여주는 찌개의 온도라는 걸
다시 배웠다.
세상은 매뉴얼로 움직이지만
마음은 늘 소문처럼 흘러간다.
위로는 큰 말이 아니라
천천히 덜어 먹는 국물 한 숟갈과
다 비우지 않아도 되는 잔 한 모금.
여름은 더워야 여름이고
그 더위 속에서
서연정의 밤은 오래 식는다.
창문을 반쯤 열자 바람이 들었다. 멀리 개울 소리, 가까이 풀벌레 소리, 마당의 풀 냄새. 진안은 일기장을 서랍에 넣으며 생각했다. 도하리의 여름은 특별할 거야. 여름의 더위가 깊을수록, 이 서연정의 국물도 더 깊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