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

단편소설

by 무연


희정은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반,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창밖으로는 희미하게 첫차 소리가 스쳤다. 경기도 근교의 낡은 아파트, 그 안에서 작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사는 희정의 하루는 늘 똑같이 시작됐다. 물이 졸졸 흐르는 세면대, 찬 물에 얼얼하게 씻겨 나간 얼굴, 그 위에 대충 덧칠한 화장품 몇 가지. 화장대 위에는 수십 번을 손에 쥐었을 립스틱과 쿠션이 정렬해 있었지만, 희정이 집어드는 건 언제나 무채색의 그림자처럼 존재감 없는 것들이었다.


거울 속 희정의 얼굴은 오늘도 무표정이었다.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고, 입술은 꼭 다물린 채였다. 누군가가 이 얼굴을 본다면, 차라리 피곤함을 지나친 나무의 껍질 같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정은 그렇게 살아왔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특별함은 늘 피곤을 동반하니까.


서울까지 편도 두 시간. 지하철은 어김없이 희정을 삼켜 넣었다. 칸 안은 회색의 정적 속에서 삐걱이며 나아갔다. 사람들은 휴대폰 화면에 고개를 묻거나, 졸린 눈꺼풀을 비비며 오늘도 어제처럼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희정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무채색의 소시민.


대학 시절 친구들은 아직도 연락이 올 때마다 말했다.
“야, 여행이라도 가. 네 또래들은 다들 유럽 한 번쯤 갔다 왔어.”
“연애 좀 해라. 사람은 사랑하면서 사는 거야.”
“쉬는 날에 다른 거라도 해봐. 자격증 따든지, 동호회 들어가든지.”


그러나 그런 말들은 희정에게 닿지 않았다. 쉬는 날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유튜브 화면을 무의미하게 넘기며 흐릿하게 흘려보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누군가와 붙어 지내는 일, 어울리는 일은 그녀에게 지나친 에너지를 요구했다. 그래서 혼자 먹고, 혼자 웃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모처럼 일찍 퇴근하게 된 길. 붉은 노을이 꺼져가는 하늘 아래, 희정은 늘 다니던 길을 따라 무심히 걷고 있었다. 아파트까지 이어지는 골목은 수백 번 오갔던 풍경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순간 코끝을 스치는 향이 있었다.


라벤더.


희정은 걸음을 멈췄다. 무거운 가방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 아픔조차 잊은 채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이 닿는 한 모퉁이, 문이 활짝 열린 꽃집에서 연보랏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백 번을 지나쳤음에도 단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가게. ‘오늘의 꽃, 라벤더’라는 작은 간판이 희정의 시선을 붙잡았다.


희정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무채색 속에 길들여진 눈이 보라색을 낯설어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낯섦이 신기했다. 마치 평범이라는 굴레에서 아주 잠시 벗어난 듯한 기분. 희정은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꽃집 안은 라벤더로 가득했다. 은은한 보랏빛 물결이 줄줄이 진열되어 있었고,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마다 향기가 묻어 나왔다. 희정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아…”

평생의 표정이 담담했던 입술에서 나온, 뜻밖의 소리였다.


그날 저녁, 지하철 칸 안에서 희정은 한 다발의 라벤더를 품에 안고 있었다. 땀 냄새와 피로에 젖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그녀만 다른 빛을 들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힐끔거렸지만, 희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이 라벤더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희정은 조심스럽게 컵에 물을 따르고, 라벤더를 꽂았다. 작은 책상 위, 스탠드 불빛에 드리운 보랏빛 그림자가 방 안을 채웠다. 방 안은 여전히 좁고, 여전히 어두웠지만, 공기만큼은 달라졌다. 싱그러운 향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때 희정의 머릿속에 스쳤다.
내가 잠식되는 것이, 물이 아니라면…

라벤더였다.


희정의 일상은 내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출근길은 그대로고, 점심은 혼자 먹고, 퇴근길은 무표정한 회색 속에 묻힐 것이다. 그러나 희정은 이제 책상 위에 한 다발의 라벤더가 있다는 것을 안다. 무채색의 삶 속에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보라색.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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