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며드는 것들
입덕부정기. 이 말이 유행한 지는 꽤 시간이 지났지만 뜻을 잠시 설명하자면 ‘자신이 어떤 분야나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음을 부정하는 시기’를 뜻하는 신조어이다. 즉, 말로는 부정하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덕질’에 입문하기 일보 직전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요새 입덕부정기를 겪는 중이다. 그것도 여러 가지에.
먼저, 커피이다. 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긴 하지만 주로 감탄고토하는 어린이 입맛이었다. 그래서 카페에 가서 음료를 마시면 항상 달달한 음료를 마시곤 했다. 초코칩이 잔뜩 들어있는 프라푸치노, 가끔 어른스러워지고 싶을 때는 휘핑크림 올린 바닐라 라떼. 심지어 디저트를 먹을 때도 달콤하다 못해 혈관 막히는 맛의 음료를 곁들여 먹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커피는 맛이 없잖아!
하지만 최근,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요새는 단 걸 그다지 맛있다고 느끼지 못할뿐더러, 어쩌다 당이 땡긴다는 핑계로 단 걸 먹으면 항상 입이 너무 달고 텁텁해서 후회한다. 알코올에 환장하던 시절에는 카페 가서 수다 떠는 것보다는 술을 마시는 게 어색하지 않고 더 즐겁지 않겠냐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요새는 술 없이도 재밌게 놀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카페에 찾아가서 약간의 어색함이 감도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퍽 즐겁다. 특히, 카페에 고양이나 강아지가 있으면 아주 환영이다.
물론 오직 살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수혈할 때도 있고, 아직 커피 맛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뭐,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둘째, 책이다. 사실 책은 어렸을 적에는 정말 좋아했지만, 바쁘다는 핑계와 스마트폰에 도둑맞은 집중력으로 인해 성인이 되고 꽤나 멀리했었다. 무엇보다 나는 책을 매우 심하게 편식하는 편이다. 소설은 푹 빠져서 금방 읽는 데 비해 비문학은 거의 읽지 않았다.
하루는 우리 반 연희가 팔을 움직일 수 없어서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이 있었다. 연희는 5분 거리에 사는 보호자를 기다리는 상황에서도 멀쩡한 한 팔로나마 책을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 연희를 보면서 무언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주말에 하릴 없이 유튜브를 틀어놓다가 알고리즘에 의해 <도둑맞은 집중력>에 관한 영상, 이동진 평론가의 독서에 대한 강의를 보고 책을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의 조언대로 책을 간지나게 한 손에 들고 지하철에 탔다. 고작 5분 남짓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읽고 나니 계속해서 책을 읽고 싶었다. (이동진님의 말처럼 ‘책을 읽는 나’에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침 독서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평소에는 산만하거나 멍을 때리던 아이들도 내가 앞에서 책을 읽고 있으니, 평소보다 집중이 잘 되었다는 피드백을 해 주었다. 나는 앞서 말했다시피 덤보 귀(아주 대단하고 커다란 팔랑귀)다. 이 기회를 빌려 아예 중고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
그곳은 정말 황홀했다. 서점 곳곳에서 사람들이 휴대폰 대신 책에 푹 빠져있는 모습도 좋았고,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책 내음이 코 끝에 와닿는 것도 좋았다. 기분이 좋으니, 평소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비문학 서적들도 들춰보게 되었다. 고르고 골라서 책 2권을 사고 나왔는데,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이어폰에서는 선선한 저녁의 공기와 잘 어울리는 keshi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는 양 팔에 책을 끼고 실실 웃으며 뛰어다녔다.
아, 내가 책 살 때 이렇게나 행복해할 줄이야. 몰랐는데 나, 책을 꽤 좋아하나 보다.
셋째, 우리 반 아이들이다. 이전에 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교사’라는 제목의 글이 무색하게 요즘은 우리 반 아이들과 노는 게 조금 재미있다. 물론 아이들을 여전히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오늘도 나를 화나게 만들고, 잔소리하게 만들어서 미간의 주름을 1개 더 추가했다. 그렇지만 내 말에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고, 생각지도 못한 참신한 질문이나 답변을 내놓고, 혼이 나서 시무룩해 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웃으면서 다가오는 모습은 참 신기하다.
글쓰기 공책을 받자마자 내가 어떤 답글을 남겼을지 후다닥 펼쳐보고, 내가 다가가면 부담스러워하며 피했던 아이가 먼저 나를 불러서 잘한 것을 자랑하고, 수업에 관심 없고 지루해 하는 것 같다가도 다음 시간에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해하는 모습은 타성에 젖은 나를 일으켜 세운다. 요즘에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같이 놀거나, 조금 짓궂게 놀려서 펄쩍펄쩍 날뛰며 반응하는 것을 보는 것이 학교생활의 낙이다. 아이들에게 조금 더 잘해주고 싶어지고,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교사가 입덕부정기를 겪게 만든 아이들의 매력은 무엇일까?
요즘은 이런 입덕부정기를 여러모로 겪고 있는 탓에 덕분에 학교 가는 게 그다지 두렵지가 않다. 아주 가끔은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도 된다. 아아아주 가끔 말이다. 물론 여전히 커피보다는 맥주가 맛있고, 책보다는 유튜브가 재밌고, 아이들보다는 강아지랑 고양이가 더 좋은 나는 입덕부정기 진행 중이다.
*글에 등장하는 모든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선선한 여름 밤의 공기와 잘 어울리는 keshi의 노래는 summer입니당. 시간 되시면 한 번 들어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