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도 있지

서로를 존중하게 하는 마법의 문장

by 단팥빵

유난히 피곤한 하루다. 그토록 좋아하던 수영도 그냥저냥 재미가 없었고, 식집사(식물을 돌보는 집사)가 되어 보겠다며 호기롭게 데려온 엄마의 식물들은 바닥에 흙물을 들이며 제멋대로 고개를 푹푹 수그려 급한 성질머리를 자극했다.


길 것만 같았던 연휴가 쏜살같이 지나간 후의 출근에 지친 건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일상에 여유를 잃은 건지 애꿎은 엄마에게 화를 내고야 만다. 아마 ‘짱구는 못말려’에 나오는 유리가 샌드백으로 사용하는 토끼 인형 같은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 한심하다. 봄바람이 이다지도 쓸쓸했던가.


시린 눈을 가만히 감고 있다가 주말에 머리를 빡빡 밀었다면서 잔디 인형 같은 머리를 불쑥 들이밀던 훈이를 떠올린다. 훈이는 큰아빠가 미용실을 하시는 덕에 노란색, 분홍색 등 가지각색으로 머리를 염색해 오던 우리 반 대표 째쟁이(멋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의 전라도 방언)다.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밀었냐고 했더니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단다. 너 제법 줏대가 있구나. 쓱쓱 만져보니 부들부들하다. 마을 어귀에 떨어져 있는 밤톨처럼 보송보송하고 잘 구워낸 알감자처럼 따끈하고 동글동글하다. 한 시간에 한 번씩은 만지고 싶은 촉감이다.


훈이는 막상 머리를 박박 깎고 나니 어색하고 부끄러웠는지 자꾸만 후회한다고 말한다. 삭발도 아무나 잘 어울리는 거 아니라고, 이마 라인도 모난 데 없고 뒤통수도 동글동글해야 잘 어울리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훈이는 내일 있을 학교 행사에서 선배들도 다 볼텐데 머리가 이래서 창피할 것 같다고 말한다. 만 10세, 슬슬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일 나이다. 뭐 어때. 선생님 친구는 여자인데도 삭발하고 남들이 쳐다보든 말든 당당하게 다녔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일순 헉, 하고 놀란다.


3초 후, “그럴 수도 있지.”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우리 반의 전매특허 명대사다. 그럴 수도 있지. 무언가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행동을 했을 때나 실수했을 때 우리 반 아이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과연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말이 기특하고 신기하다. 그럴 수도 있지는 전염성이 강해서 진짜 그럴 수도 있다고 믿게 된다. 마법의 문장이다.


가끔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죽어도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수영 강사님이 나 빼고 다른 회원님들만 봐주는 바람에 허우적거리면서 뺑뺑이만 돌다 온 게 황당할 때도, 곰손으로 애써 심었건만 고개를 푹푹 떨구고 누렇게 말라비틀어지는 식물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고 답답할 때도 있다.


아이들의 사소한 실수와 생각 없이 뱉은 철없는 말들이 온종일 모래알처럼 씹힐 때도 있다. 아빠의 황소고집이 답답할 때도, 엄마의 사랑이 넘쳐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내 맘대로 되는 거 하나 없고, 사소한 이유로 짜증이 치밀어오르거나 무기력이 온몸을 지배하기도 한다.


오늘처럼 글이 도저히 안 써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앞으로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서 배운 마법의 문장을 소리 내어 곱씹어 보도록 해야겠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가끔은 그럴 수도 있는 거다.





*글에 등장하는 모든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비록 벚꽃은 다 졌지만 봄내음 맡으며 산책 자주 하시길 바라요.

다음주도 아자뵤!

keyword
이전 03화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