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어제 뭐 먹었어?
✣ 황집중의 단련일기
아. 배고파. 일과가 늦게 끝나는 날은 집에 들어가는 길이 초조하다. 어디보자 집에 먹을 게 뭐가 있더라. 로메인 씻고, 토마토를 썬 다음, 옥수수도 얹고… 지난 호 단련일기에서 초록한 장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생협에서 로메인을 한 포기를 사 두었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니 샐러드 같은 생야채가 들어간 음식을 찾게 된다. 반면 추운 겨울엔 국이나 스튜 같은 따뜻한 음식들이 당긴다. 초록 잎을 오랜만에 사는군. 로메인을 사며 계절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요즘 핸드폰에 사진이 꽉 차서 작년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데 월별로 바뀌는 음식 사진이 흥미롭다. 볶고, 끓이고, 익히는 음식에서 시원하고 차갑거나 생으로 먹는 음식으로 변하는 모습에 한 해는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이맘때쯤 먹었던 예전 사진을 보며 올해 내가 먹을 음식을 미리 보는 기분이다.
요리에 큰 욕심이 없고 최대한 간단한 조리 방법을 추구하는 편이라 평소에도 ‘두세 단계가 넘어가는 요리는 하기 싫어요’라고 말한다. 잘라서 먹거나, 쪄 먹거나, 끓여 먹거나 뭐 그 정도의 레시피만 허용하겠다는 뜻이다. 절차가 복잡한 음식은 어차피 배에 들어가면 똑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과감히 과정을 생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밥이 먹고 싶으면 김밥 속 재료들을 펼쳐두고 재료를 싸고 말고 다시 자르는 게 귀찮아 그냥 쌈처럼 싸 먹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샐러드는 참 간편하고 좋은 음식이다. 씻어서 담아 먹으면 되니.
집에 도착하면 본격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짐을 내려놓고 손부터 얼른 씻는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재료들을 조리대에 줄 세워둔다. 로메인부터 포기 뿌리를 댕강 잘라 물에 씻는다. 식초도 몇 방울 떨어뜨리고 혹시나 벌레가 없는지 뒷면을 잘 살피며 (주로 유기농인 생협 채소는 벌레와 달팽이가 가끔 등장하므로) 초조한 손동작으로 잎을 씻는다. 다 헹구고 나면 체에 밭쳐둔다. 조금 전 샐러드가 간편하다고 한 말을 취소할까 생각 중인데, 어떤 측면에선 재료를 씻고 다듬는 게 요리를 할 때 가장 귀찮다. 오늘은 채소의 가짓수가 많지 않아서 참는다. 그리고 나머지 할 일은 집에 있는 채소와 과일을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 일이다. 이때 배고프다고 칼질을 대충대충 하면 재료를 썰다가 쏟을 수 있으니 특별히 주의한다. 한 번은 토마토 급하게 썰다가 토마토가 날아가서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는데 그것처럼 허망한 일이 없었다. (그럼 요리하다가 청소까지 해야 한다.)
아무튼 무사히 채소들을 다 썰면 접시에 담는다. 생야채들은 파릇파릇한 힘이 있어 재료들이 잘 미끄러져 접시 밖으로 탈출한다. 뒷정리의 수고를 덜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쌓는다. 초록, 빨강, 노랑… 무의식적으로 색을 조화롭게 담으려고 하는 그림쟁이의 쓸데없는 직업병이 발휘되기도 한다. 아무튼 재료를 잘 담았으면 마지막으로 소스를 뿌린다. 소스는 올리브 오일을 베이스로 발사믹이나 그냥 식초를 뿌리기도 하고 때론 피클 국물을 넣기도 한다. 그리고 최종의 최최종으로 통후추를 뿌린다. 맛과 향도 미묘하게 달라지지만 까만 점들이 샐러드 정수리에 흩뿌려져 한 접시의 그림을 완성하는 듯하다.
모든 과정이 마치면 쟁반에 접시를 받쳐 ‘드디어’라는 마음과 함께 식탁으로 옮긴다. 이때 맥주나 와인을 한 잔씩 곁들이는 건 오늘 하루에 대한 보상이다. 여기에 데친 두부까지 있는 날엔 금상첨화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상을 세팅해두고 첫입을 먹는다. 초록의 상큼함을 입안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면 피로가 풀리는 기분. 오늘 하루의 시간을 버틴 건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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