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회피형 남자와의 연애 4
“자기야 미안해. 나 내일은 못 만날 것 같아. 가족 약속이 생겨서 본가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며칠 카톡 답이 시원찮던 그가 다음 데이트 약속 전날 나에게 카톡으로 남긴 말이었다.
원래 답이 느린 편이라 특별히 더 느려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연인 사이에 카톡을 하다 보면 애정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지막 데이트가 끝난 후, 한동안 그와 나누는 카톡에서는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미묘하게 애정이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상황도 별생각 없이 넘겼다.
‘피곤한가 보다~ 이번 주는 야간 근무인 주니까. 주말에는 당직도 있고.‘
내 뇌는 아무래도 긍정요정에게 지배당한 게 분명하다.
그렇게 그는 우리의 다음 데이트는 언제로 하자는 말도 없이 약속을 취소했다.
생각해 보니 항상 약속은 내가 먼저 잡았다.
“자기야, 다음 주 화요일에 휴무지? 그날 시간 돼? 약속 있어?”
“아니, 없어!”
“오, 우리 그럼 다음 주는 화요일에 보는 거 어때?”
“그래! 좋아! 너무 기대된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딱히 나랑 만나는 걸 싫어하진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나에게 절대 먼저 만나자고 말하지 않았다.
매번 내가 나서서 다음 약속을 잡았고 그는 내 약속을 허락(?) 해 주었다.
고마워라...
*
그렇게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당하고 그다음 약속을 잡으려는데 그는 묘하게 나와의 약속을 계속 미루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느낌일 뿐이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야, 이번 주는 주간 근무라 6시 퇴근이지? 무슨 요일이 좋아? 주말에 못 봤으니까 빨리 보고 싶어!”
“음... 이번 주는 선배들이랑 술자리가 한번 있을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일지 아직 잘 모르겠어... 정해지면 말해줄게. “
“아~ 그래? 그럼 그거 정해지면 정하자~”
물론 가족들을 만난다는 것도, 선배들과의 술자리가 있다는 것도 전부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는 항상 나와의 약속보다 본인의 가족, 본인의 주변 사람들이 더 중요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가족보다, 회사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다른 일이 생기면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약속부터 제일 먼저 취소한다는 부분이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후부터, 그에게서 내 우선순위는 항상 제일 마지막이었다.
언제든 제일 먼저 버릴 수 있는 패처럼.
*
“퇴근했어?”
분명 퇴근했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연락이 없었다.
6시 퇴근이던 날, 그는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답장이 왔다.
“미안해...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바로 잠들었어...”
세 번째 단점, 그는 잠이 많았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진짜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았다.
쉬는 날이면 15시간은 기본으로 잠을 잤다.
너무 연락이 안 돼서 대체 어디인지, 뭘 하는 건지 재차 묻는 날이면, 그는 매번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자느라 연락을 못 받았다고 답장했다.
너무 지나친 그의 행동에 나는 점점 그를 의심하게 되었지만, 돌이켜보면 웃기게도 그는 딱히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을 뿐.
사실 나중에는 그런 의심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진짜 잠이 많은 걸 알게된 것도 있지만,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약속만 생기면 매번 “나 너무 가기 싫어... 벌써 불편해...”라고 내게 말했다.
한참 사랑이 불타오르던 연애 초반부터 그는, 제일 좋아하는 나랑 만나는 것마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일’이었는지 내가 조금 더 자주 보고 싶다고 했던 말에 본인은 일주일에 한두 번만 만나고 싶고, 나머지는 혼자서 쉴 시간이 필요하다고 딱 잘라 말했던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딱히 단호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유부단한 편이었는데 이 부분에서는 세상 단호했다.
조금 서운할 뻔했지만, 혼자 있을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도 있는 거고, 나도 혼자서든 친구들이랑 함께든 알아서 시간을 잘 보내는 편이었기에 금방 납득하고 넘어갔다.
차라리 그가 거짓말을 한 거면 크게 싸우기라도 할 텐데, 나는 그와 싸울 수도 없었다.
*
“퇴근하면 피곤한 건 알지만 퇴근 전이든, 집에 가서든 연락 한 번만 해줄 수 있어? 그렇게 집에 가서 바로 잠들어버리면 나는 네가 퇴근은 했는지, 집에는 갔는지, 약속이 있어서 누구를 만나러 간 건지, 집에 갔다면 너희 집으로 갔는지 본가로 갔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네 연락이 오기만 기다려야 해.”
“음... 미안해...”
“미안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자주 연락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거 알지만 조금만 노력해 주면 좋겠다는 뜻이야. 네가 딱히 딴짓을 할 사람이 아닌 것도 알고,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알지만, 나 점점 네 연락만 기다리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라 조금 속상해~”
웃음을 지으며 그가 상처받지 않게 최대한 예쁘게 말을 이어가고 있던 나에게는 고작 “알겠어... 우리 오늘은 이만 집에 가자.”라는 무심한 대답만 돌아왔다.
“우리 방금 만났는데?”
“근데 난 집에 가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머리 아파.”
일주일만의 데이트인데.
심지어는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평소에 집까지 꼭 데려다주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택시를 잡아주겠다며 얼른 집에 가라고 나를 떠밀었다.
“아프면 만나기 전에 말하지. 그럼 다음에 만났을 거 아냐. “
“아까는 괜찮았는데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
“...혹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싸우자고 말을 꺼낸 게 아니고 그냥 조금만 노력해 줄 수 있냐고 좋게 말한 거잖아... “
“그만 좀 해.”
“...? 싸운 것도 아닌데 뭘 그만해... 이렇게 상황을 끝내지도 않고 애매하게 가버리면 계속 찝찝하지 않아? 좋게 마무리는 하고 집에 가야 편하게 쉬지. 심지어 우리가 지금 싸운 것도 아닌데 갑자기 대체 왜 그래?”
“ㅇㅇ아, 나 지금 머리가 너무 하얘서 아무 생각이 안 들어. 제발 그만하고 집에 좀 가자. 나중에 얘기해. “
더이상 내 말을 들으려 하지도, 듣고싶어하지도 않는 그를 보며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그의 답장은 더 늦어졌고, 애정표현은 훨씬 더 줄어들었다.
대화 패턴은 비슷했지만 항상 사용하던 귀여운 커플 이모티콘 대신 그 자리에 매번 어색하게 ㅎㅎ 두 개만 남겼다.
너무 애매하고 찝찝하게 마무리된 대화에 나는 상황을 마저 끝내고 싶었지만 그는 나와 그날 일에 대해서는 전혀 대화해 주지 않았다.
약속이 있으면 인증사진을 보내오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듯 보였지만, 내가 그날의 이야기만 꺼내면 그는 한참을 답장하지 않았고, 몇 시간 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야기를 꺼내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그가 나와 아직은 헤어지기 싫어서 했던 행동이었다.
헤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헤어지기 싫어서.
*공포회피형 연인의 특징 2 :
상대가 서운한 점을 이야기하면 서운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본인 전체’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그들에게는 ‘본인과 딱 맞는 사람’,그리고 ‘안 맞는 사람’ 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아무리 잘 맞았던 상대라도 서운한 점이 생기는 순간, 그 상대는 곧바로 본인과는 ‘안 맞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본인의 서운함을 이야기하지도 않으며, 상대의 서운함을 듣는 순간 이별을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본인의 마음 속에서 이별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을 때, 그들은 혼자 생각을 정리한 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상대 앞에 다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