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승마장은 말을 마구간에서 데리고 나와서 패드와 안장을 얹히고 고삐를 채우는 일, 즉 장안을 모두 회원이 해야 한다고 했다. 승마에서 장안은 타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제주대학교 승마아카데미 이후에 너무 오랜만에 장안을 하게 된 나는살짝 긴장되었다. 게다가 다비는 한라마라고 하는 데 다른 말보다 덩치가 꽤 크기도 했고, 물론 내가 못 하는 거긴 하지만 성격이나 습성을 잘 모르는 처음 보는 말의 입을 벌리고 고삐를 채운다는 건 내 생각으로는 보통 담력이 아니면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장안을 마치고, 다비와 함께 마장으로 들어섰다.
"여기, 무전기요. 이걸로 부드럽게 통신할 거예요."
덜커덩 선생님은 내 승마조끼에 무전기를 달아 주셨다.
"이제 소리 안 질러요."
덜커덩 선생님은 재차 내게 말씀하셨지만, 오늘 내게 절대로 소리를 안 지르시겠다는 걸 스스로 다짐하시는 건 아니었을지 싶기도 하다.
나는 오늘 처음 만난 다비를 타게 돼서 살짝 긴장은 됐지만, 지난겨울부터 여름까지 우리 승마장에서 열심히 연습해 왔기에 별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내심 기초를 튼튼히 다져왔으니 '오랜만에 만난 덜커덩 선생님께 지난번보다 훨씬 승마가 늘었다는 소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무전기에서 덜커덩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희 쌤, 여기 회원분들이 용희 쌤이 달리면 다들 피해줄 거니까 한번 달리고 싶은 대로 마음껏 달려보세요."
자상한 목소리로 덜커덩 선생님이 말했다. 하지만 난 잊었던 기억이 돌아와 버렸다. 대마장에서 나는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잘 몰라서, 늘 트랙 밖으로 빠져서 힐링 승마를 즐겼다는 것.
'아뿔싸.'
지금 다니고 있는 승마장은 편백나무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트랙이 마련되어 있는데, 선두 말이 달리면 다음 말들은 종대로 그 선두 말을 따라 달리면서 기본적인 자세와 필요한 기술을 익힌다.
말은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선두 말이 잘 달려주면 그 뒤 말을 탄 사람들은 컨트롤을 잘 못 해도 안전하게 승마를 할 수 있어서 그렇게 나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발목 쓰는 법, 무릎 쓰는 법, 좌우 골반의 균형을 잡는 법 등을 지난 8개월간 열심히 연습하게 되었다.
지금 내 실력이라 함은 이제 조금 말 등에 앉는 게 편해진 단계인데... 이렇게 대마장에서 내 맘대로 말을 몰아보라고 하시니까 제주대학교 승마아카데미 때 대마장에서 무서웠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됐다.
대마장에서 말을 자유자재로 타려면 내가 어느 정도 말 컨트롤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일단 어쩔 줄 모르겠고 마음껏 타라 시니오늘 난 진짜 망한 것 같다.
"아, 나 몽골 가려고 했는데 몽골은 절대 못 가겠네요."
내가 소리치자 어리둥절해진 덜커덩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왜요?"
"무서워요."
몽골에서는 횡대로 달린다고 하는 데, 시작하자마자 벌써 경로 이탈한 내 모습이 그려진다. "무서워요."라는 나의 말에 사실은 선생님도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이 떠오르신 듯했다. 나는 말이 무섭고, 선생님은 내가 어지럽다는 걸.
선생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선수들은 대마장에서 편하게 타면서 장애물도 팍팍 잘 만 넘는 데, 나만 지금 말 등에서 날아갈 것 같은 자세로 달려가게 되었다. 어차피 방향은 잘 모르겠고, 지금 내가 잘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니, 나는 그냥 뭐 어쩌겠나 싶어서 앞만 보고 말을 몰아 보았다.
"용희 쌤, 지금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무전기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괜찮은데요?"
나는 뭐 앞만 보고 빨리 달리는 건 자신 있어서 다비가 명마라고 하니, 나는 그냥 고삐를 꼭 잡고 막 달려보았는데, 다비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고삐 당기지 말고 손은 말 갈퀴만큼 아래로 내리세요."
나는 고삐를 당기지 않으려고 손을 아래쪽으로 최대한 내려보았는데, 속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무서워서 고삐를 손잡이로 사용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손은 어느새 내 허리 부분까지 올라가 버렸다.
"용희 쌤은 오늘 고삐만 고칠게요. 고삐를 엄지와 검지만 이용해서 잡아보세요."
선생님의 말씀에 선생님 앞으로 말을 몰아 잠시 멈춰서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저기 쌤, 손가락 두 개만으로 고삐를 잡는 게 가능해요?"
"가능하죠."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손가락 두 개로 고삐를 잡고 말을 달려보았다. 무전기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대한 말을 펜스로 붙여서 달리세요."
나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고삐를 두 손가락으로 잡고 말을 왼쪽으로 몰아서 펜스 가까이에 붙이고 말을 몰았다. 나는 이때는 선생님께서 왜 말을 펜스로 붙여서 달리라고 하시는 건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 우리 승마장 선배님들께 여쭤보니, 말은 중앙으로 자꾸 들어오는 습성이 있어서 말 컨트롤이 안 되면 이렇게 펜스에 붙여서 달리라고 하신다고 했다.
나는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말을 왼쪽으로 돌았다가 방향 전환해서 오른쪽으로 달리다가 S자로 달리다가 맘 대로 하기 시작했다.
"용희 쌤, 펜스에 붙이라고 했는데 어디 갔어요? 더 붙이세요. 손은 더 아래쪽으로 내려요."
내가 뭔가 하려고 하면 귀신같이 덜커덩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전기는 선생님이 부드럽게 말씀해 주셔서 참 좋은데, 내 등 뒤에서 계속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니까 흡사 내가 이동식 CCTV를 달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 났다.
이제 다비도 슬슬 머리를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다비의 머리가 내 가슴만큼 올라와서 머리를 앞뒤로 세차게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덜커덩 선생님께 여쭤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비는 원래 다른 말보다 머리를 더 아래로 내리고 달리는 말이라, 내가 다른 말보다 고삐를 더 아래쪽으로 잡아줘야 하는 거라 하셨다.
나는 손의 위치는 말이 내게 맞추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말에게 맞추는 거란 걸 처음 알게 되었고 말의 머리 위치에 따라 기수도 손 위치를 다르게 해야 된다는 걸 배웠다. 또한 내가 골반과 허리를 좀 더 유연하게 리듬을 타 줘야 하는 데 말 등을 쿵쿵 찍으니까, 말이 싫어서 머리도 흔들게 되는 거란 것도 알게 되었다.
'아... 평온한 덜커덩 선생님 승마장에 와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다비가 나 때문에 힘들었나 싶기도 했고, 혹시 다음에 또 덜커덩 선생님 승마장에 놀러 오게 된다면 적어도 고관절과 허리를 마디 하나하나 유연하게 쓸 수 있게 만들고 와야 하지 않을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올해 열심히 연습하면 내년에는 나도 장애물 경기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니 선수들은 가뿐하고 사뿐하게 말에서 리듬을 잘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용희 쌤, 이제 가운데로 오셔서 수업 마칠게요."
그렇게 50분간 나는 덜커덩 선생님과의 눈물 나는 재회를 마치고, 말에서 내려왔다.
"쌤, 저오늘 결국 손 고쳤어요?"
나중에는 말이 잘 타 져서 혹시 손을 고쳤나 하는 마음으로 덜커덩 선생님께 물었다.
"아뇨."
역시나 선생님은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다.
"쌤, 그러면 오랜만에 봤는데 제 승마가 어땠는지 말해주세요."
나는 혹시나 아주 약간이라도 늘었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생님께 부탁드렸고, 덜커덩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다가 너무 솔직한 피드백을 들으면 마상을 입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내가 말했다.
"아뇨. MSG 많이 치고 약간 아름다운 렌즈를 낀 상태로 많이 미화해서 말씀해 주세요. 아니면 저 승마에서 경로 이탈할 것 같아요."
그러자 덜커덩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일단 말은 잘 보내시더라고요. 승마에서 말을 잘 보내기만 해도 50%는 성공이에요. 그런데 아직 말이 무서워서 그런지 동작이 너무 얼어있어요. 그래서 힘을 빼지 못하고 몸이 자꾸 움츠러드니까 손도 올라가는 거고요. 그리고 방향 전환할 때 오른쪽으로 고삐를 당기면 멈추지 말고 다리도 추진을 줘야 하는데, 당기고 추진을 주지 않으니까, 속도가 줄어들고요. 그렇게 하면 방향 전환할 때마다 말이 멈추라는 신호로 알고 달리는 속도를 줄여요."
나는 어쨌든 선생님이 칭찬도 해주시고 피드백도 부드럽게 해 주셔서 내게 하신 말씀을 잘 듣고, 우리 승마장으로 돌아왔다.
우리 승마장에서 나는지난번 함께 몽골 얘기를 했던 회원분을 만나, 그 회원분께 덜커덩 선생님네 승마장에 가서 말도 구경하고 승마했단 얘기도 하면서 덜커덩 선생님이 해주신 피드백도 말씀드렸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회원분이 말씀하셨다.
"초보가 두 손가락으로 타도 될 정도면 말이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말이라는 건데..."
그 말을 듣고 내가 대답했다.
"네, 맞아요. 선생님이 승마장에서 다비가 제일 좋은 말이라고 하셨어요."
회원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그 선생님이 엄청나게 돌려서 말씀하신 거긴 하지만... 갈길이 멀다는 얘기예요. 원래 초보들은 대마장에서 혼자 타기 어려워요. 돌발 변수도 너무 많고..."
으아, 나는 드디어 현실을 알아버렸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는데, 여전히 갈길이 먼 실력이라니... 승마는 도대체 얼마나 해야 잘하게 되는 걸까?
"나름대로는 이제 제법 탈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장애물 경기도 한 번 나가보려 했었는데... 속상하네요."
나는 올해는 열심히 실력을 키우고 내년쯤 덜커덩 선생님네 승마장에 가서 장애물 훈련을 받고, 경기에 나가볼지 상상해 봤다. 덜커덩 선생님께 여쭤보니 지금 내 실력으로는 매일 승마장에 나와서 3~4개월 훈련받으면 경기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내 말을 듣던 회원분이 말했다.
"장애물은 위험하니까 마장마술에 한 번 도전해 보지, 그래요?"
"마장마술이요?"
"네, 마장마술 하면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컨트롤을 다 배울 수 있거든요. 우리 승마장 이미정 선생님이 마장마술 잘 가르치는 데..."
나는 수업시간에 이미정 선생님을 만나면 덜커덩 선생님네 승마장에 다녀온 얘기를 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