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을 보고
OTT 채널을 돌리다 눈길을 끄는 제목 하나를 발견했다. 페르시아어 수업. 호기심에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제2차 세계대전. 청년 질은 페르시아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총살에서 제외되고 수용소에 남게 된다. 요리사 출신의 코흐 대위는 그에게 매일 페르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언젠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음식점을 열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흐는 그 꿈을 위해 언어를 익혔다.
그러던 중 독일군이 연합군에 밀리자, 코흐는 질을 데리고 수용소를 빠져나온다. 연합군 막사에 도착한 질은 자신이 기억하는 수용소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불러내며 눈물을 흘린다. 한편, 코흐는 독일군 장교복을 벗어던지고 이란의 공항으로 향한다. 배운 페르시아어로 간절히 설명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언어를 말하는 수상한 사람으로 체포되고, 바닥에 쓰러진 채 절규한다.
사실 질이 가르친 것은 진짜 페르시아어가 아니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는 페르시아어 책을 가진 누군가에게 샌드위치를 주고 그 책을 얻는다. 곧 총살이 시작되고 페르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한 질만 살아남는다. 그는 코흐의 사무실에서 수용소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매일 네 단어 이상의 새로운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야 했던 그는 그 명단 속 이름을 조합해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로운 가짜 언어를 만들어내는 질. 그리고 그 단어들을 조합해 시까지 읊어대는 코흐. 나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 작은 몸서리를 쳤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질은 수용소에서 죽어간 2,840명의 이름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 나 역시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질은 살아남기 위해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매일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아 죽은 자들의 이름을 세상에 증언했다.
반면 가짜 언어를 진짜라고 믿으며 닫힌 세계를 벗어났다고 생각한 코흐는 다시 다른 세계에 갇혔다. 테헤란 공항 경찰에게 붙잡히고 꿈꾸어 오던 ‘헤테로토피아’로 향하던 길이 좌절되자 그는 절규하며 무너진다. 그 모습에서 잠깐 연민이 스쳤다가 곧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 정리한 개념. 아이히만은 유대인 600만 명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지만 전쟁 후 남미로 도망쳤다. 1961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잡혀 재판에 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크건 작건 아돌프 히틀러나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맡은 일을 ‘그저 수행’했다는 이유로 거대한 악을 완성할 수 있다. 조직의 한 개인이 명령과 규칙에 비판 없이 복종하며 “그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합리화할 때 폭력과 억압은 그렇게 일상이 된다.
영화 속 코흐의 동료들 역시 그랬다. 유대인을 폭행하고 목숨을 빼앗으면서도 피크닉을 즐기고 사랑과 질투에 흔들리는 일상을 보냈다. 그들은 규칙을 집행하고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지만 그 무심한 손끝에서 수많은 인간의 삶과 존재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악은 특별한 얼굴을 한 괴물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얼굴과 손끝에 묻어 있었다.
나는 서늘해진 가슴을 다시 한 번 쓸어내리고 TV를 껐다. 그리고 2,840명의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남은 질을 떠올렸다.
비록 수용소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 부딪히는 삶의 가시에 찔려 마음속에 울타리 없는 감옥을 만든다. 그럴 때 나는 어떤 이유를 품고 나만의 감옥에서 탈출해 빛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을까.
2,840개의 이름처럼, 나를 끝까지 붙잡아줄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