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에 80입니다.”
그 한마디에 며칠 동안 묵직하게 머리를 짓누르던 두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매년 치러야 하는 숙제 같은 검진을 미루고 미루다, 12월 16일 오늘에서야 아침을 거른 채 집을 나섰다. 병원 맞은편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는데, 내과 의사인 대학 동기의 뒷모습이 병원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15분. ‘참 일찍도 출근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직 8시 30분도 되지 않았건만 대기실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아픈 이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강용괍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검진하러 왔습니다.”
사업주 검진을 거르면 벌금을 내야 한다는 원무부장의 성화에 등 떠밀려 나온 걸음이라, 말끝이 조금 퉁명해졌다. 사실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한 달쯤 전부터 스트레스와 과로 탓인지, 어지럼증과 함께 지독한 두통이 찾아왔다. 무심코 잰 혈압은 140/90mmHg. 숫자를 확인한 순간 머리는 더 아파왔다.
‘오십 줄에 벌써 혈압약을 먹어야 하나. 어머니도 드시는데 유전인가. 아니면 이 골치 아픈 일들만 지나가면 괜찮아질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며칠 밤을 설쳤다.
집 안 어딘가에 전자 혈압계가 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TV 장식장 첫 번째 서랍에는 없었다. 세 번째 서랍을 한참 뒤적이다 잡동사니 아래 숨어 있던 녀석을 찾아냈다. 빨간 버튼을 눌렀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배터리가 없었다. AA 건전지 두 개를 끼워 다시 전원을 켰다. ‘On.’ 화면에 불이 들어왔지만, 나는 슬그머니 혈압계를 책상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그때부터였다. 혈압계만 보면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확인하기가 두려워 외면한 채 열흘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축복처럼 울려 퍼진 말.
“120에 80입니다.”
최근 들은 어떤 감탄사보다 달콤한 소리였다.
고혈압 기준인 수축기 140mmHg, 이완기 90mmHg에 못 미치는 완벽한 정상. 병원에만 오면 혈압이 오른다는 ‘백의고혈압(White coat hypertension)’도 아니니, 내 혈관은 아직 쓸 만한 모양이었다. 귓가에 맴도는 숫자를 뒤로하고 서둘러 내 진료실로 향했다.
출생률 감소에 유행병도 없어 한가하던 아동병원은, A형 독감이 잠깐 돌기 시작하면서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들을 진료하고 검사를 보냈다. 첫 번째 환자인 세 살 사내아이는 독감 확진이었다.
“며칠은 집에서 쉬어야 합니다.”
내 말에 아이 엄마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세 번째로 들어온, 앞니가 빠진 여섯 살 여자아이는 음성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일이라도 열이 안 떨어지면 다시 검사해야 합니다.”
당부를 끝까지 듣지 못했는지, 아이 엄마는 한결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나갔다. 아마도 듣고 싶은 말만 귀에 남았을 것이다.
가만 생각하니 오늘 아침, 내과 친구가 내게 “내시경도 한 번 하자”고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120에 80’이라는 숫자에 취해 그 말을 말끔히 흘려버렸다.
나 역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영락없는 환자였다.
입안에 고여 있던 행복한 숫자 둘을 천천히 굴려 보며, 나는 다시 나의 하루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