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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예 Sep 23. 2024

사진기사 아저씨가 건네준 그의 사진

축구장에서 받은 선물들

김남일 사진이다. 그라운드 입장 전 선수들이 서있는 그곳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찍은 희귀한 사진이다. 방구석 어딘가에 박혀 있다 이사할 즈음 여는 이 알록달록한 커버의 사진 앨범을 보고 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흐릿한 그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정말요? 저 주시는 거예요?"나 "꺅. 감사합니다." 이 정도 대사가 기억이 난다. 그 아저씨는 사진 기사였다. 어떻게 고용되어서 그라운드를 돌아다니고 계신지는 몰라도 2006년 그 해에는 늘 거기 계셨다. 지금도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눈에 띄면 귀여워서 쳐다보게 되는데 그 시절 몇 없는 여자애들은 얼마나 귀여웠을까 기억을 미화해 본다.


아마 아저씨는 그라운드 라인을 걷다 관중석과 연결된 간이 계단으로 올라왔던 것 같다. 먼저 말을 거셨다. 애들끼리 축구장에 온 게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묻다 내게 "너는 누구 좋아하니?"라고 물었다. 짧지만 강하게 좋아했던 그 선수의 이름을 수줍게 말했다.


"김... 남.. 일.. 선수요."


갑자기 아저씨는 신이 난 듯 사진 앨범을 꺼냈다. "여기 이것도 있고 이 선수 사진도 있고..." 하면서 보물창고를 열어 구경시켜 주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곳곳에 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인화한 것이었다. 그러다 그 선수가 등장하자, 앨범을 넘기던 손을 딱 멈추고.


"자! 너 가져라." 하며 사진을 꺼내 주었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선물을 주었다. 그 사진이 내 앨범에 들어온 지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그날 이후 사진 기사 아저씨에게 영감을 받아 경기 날엔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갔다. 굳이 왜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골키퍼가 골킥을 할 때, 선수들이 프리킥을 찰 때. 줌도 안 되는 그 카메라 렌즈를 뚫어지게 보다 공에 발을 두는 타이밍에 딱 맞게, 셔터를 찰칵 눌렀다. 그렇게 초점 흐릿한 사진들과 2000년대 티켓들이 앨범에 고스란히 모여있다.




축구장에 다니다 보면 가끔, 그냥 같은 팬이라서 모르는 사람에게 받는 추억들이 쌓인다. 


처음 서포터즈석에 도전했던 날이었다. 중학생이었을까 고등학생이었을까. 친구들과 매번 E석에만 앉다 "우리 이제 도전해 볼 때가 된 거 같아."라며 입을 모아 드디어 가보았다. 멀리서만 바라본 그들의 넘치는 기백과 장대한 기세에 겁이 나면서도, 다수의 합이 만들어 내는 장관 속에 빠져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장해 어색한 몸짓으로 쭈뼛쭈뼛하다 N석 1층 위쪽에 앉았다. 조금 일찍 들어가 시작 전까지 꽤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 우리 주위에 있던 이름도 모르고 이젠 얼굴도 기억 안나는 이십 대 언니오빠들이 무언가를 건네줬다. "이거 좀 드세요."라고 존댓말을 해주며 흰색 봉투를 꺼냈다. 학생 때는 이십 대들이 어렵다. 갑작스럽게 다가와 당황해 쑥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니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 같은 음료를 주었다.


감동이었다. 여기 생각보다 되게 따뜻한 곳 같아!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최고니까. 긴장한 마음이 몇 개 쥐어준 먹거리로 녹으며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 N석의 이미지는 좋아졌고 꽤 갈만한 곳이 되었다. '나도 나중에 크면 먹을 거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다짐했고 삼김은 아니어도 초코바 하나 정도는 쥐어주는 이름 모를 어른이 되었다.




축구팬으로 살다 보면, 그냥 같은 팬이라서 받는 선물들이 많아진다. 


슈퍼샤이팬으로 선수들에게 사인 한번 받아 본 적 없던 우리를 데려가 레전드의 사인을 받게 해 준 어떤 팬. 그때 인연으로 우연히 만나면 초콜릿, 쿠키도 주었다. 딱 한 학기 같이 수업 듣고 축구장에서 다시 만난 반가움으로 매 경기 이것저것 챙겨 주는 언니. 직접 만든 헤어밴드, 미니 우산, 캐릭터 지갑 등 수도 없이 많다. 어떤 친구는 포토카드를 만들어 주고 처음 본 한 팬은 강등되지 말자며 합격 부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물론 이런 때도 있다. 아빠에게 안겨 뒤에 있던 우리와 눈이 딱 마주친 어떤 귀여운 아기. "너무 귀여워!"라는 말에 새삼 환하게 방긋 웃어주었다. 사르르 녹는 웃음에 보답하기 위해 인형 뽑기로 이것저것 뽑아온 지인이 그중 가장 큰 인형을 쥐어주려는데,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거절했다. 너무 큰가 싶어 조금 더 작은 인형을 꺼내 "이거 가질래?"라는 물음에도 절레절레. 마지막으로 더 작은 걸 꺼내 "이거는?"하고 물으니


"아니."


조그마한 아기의 단호함에 모두가 빵 터졌다. 그래, 아닌 건 아니지. 그래도 언젠가 너도 축구장에서 받은 선물을 추억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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