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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예 Oct 01. 2024

원정의 세계

축구를 핑계로, 여행을 핑계로

짠- 고생하셨어요! 를 합창하고 둥근 잔에 담긴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신다. 어둑한 시간임에도 잔뜩 허기가 져 화를 내고 있는 배에 넣을 첫 메뉴는 골뱅이 무침. 접시 위에 함께 놓인 소면을 성심성의껏 비비고 한 입 딱하니, "음- 맛있어!"가 자연히 나온다. 이 분위기에 이어 보쌈 한 접시에 해물 파전까지 등장하셨다. 최대한 빠르게 외관만 스캔하고 선택한 곳인데, 여기 들어오길 잘했다. 탁월했어.


"아주 완벽해. 경기 빼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한 테이블에 마주 앉은 우리 셋은 이렇게 말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서로의 마음에 웃음이 터졌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이 가게라며 말하다 속으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다.

 

웃기지. 누가 제발 여기로 와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경기 보러 온 사람들이 경기 빼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니. 제 발로 무려 창원까지 와놓고선 말이야. 아니, 창원이라니. 내 인생에서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경상남도 창원. 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여행지로 유명한 곳도 아닌 이 도시를, 축구를 위해서 새벽부터 기차에서 몇 시간을 보내며 왔다는 게 웃기는 일이야.




원정 경기 가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알까. "K리그를 왜 봐?"라는 K리그 팬을 도발하는 물음에 "아니, K리그가 얼마나 매력이 있는데. 어? 주저리주저리···." 흥분해 설명하던 1n년차 팬. 그 팬에게도 미처 알지 못한 세상이 있었다. 그것이 원정의 세계다.


몇 해 전, 원정에 첫 발을 내딛으며 한 단계 레벨업이 되었다. 안식년 같은 덕질 휴식기를 꽤 오래 보내며 라이트팬으로 살아왔다. 물론 언제 다시 활화산처럼 터질지 모를 '덕질 잠복기'였다. 엔진을 부릉부릉 하던 차. 우리 이제 서른인데, 지방 경기도 가봐야 하지 않겠어?라는 축구메이트와의 다짐 후 떠났다.


처음은 전주였다. 당시 우승을 밥 먹듯 하던 전북의 집, 전주성에 가보고 싶었다. 코로나로 인해 경기 관람 구역도, 허용 인원도 제한되어 마스크를 쓰고 서로 띄엄띄엄 앉았다. 자, 소리 지르지 말고 박수쳐! 입은 다물고, 유일하게 허용된 박수를 감정의 동요에 따라 강도와 속도를 달리하며 쳤다. 다시 이런 날이 올까 싶은 독특한 축구 관람을 겪었다.


남의 집이니 우리 골이 들어가도 헙 외마디와 움찔 만 할 뿐. 홈 팀의 상황에 맞게 아쉬워하는 제스처와 장내 아나운서의 지시에만 따른다. 그런데 그날 들어간 골이 무려 3골! 오랜만에 경기를 보러 갔는데, 심지어 첫 지방 원정이었는데. 해트트릭이라니? 다시는 떠나지 말고 함께 하자는 의미 인가로 하늘의 뜻을 해석해 본다.  


경기 후엔 한옥마을에서 떡갈비와 막걸리를...(또 막걸리네) 마시며 감동에 젖었다. 언제 어떤 플레이가 좋았는지, 전술이 어땠는지, 또 어떤 선수가 잘했다든지 하나하나 집다가. "몰라, 기분 너무 좋아!"를 외치며 그 경기에 취해가고 있었다. 그 장면 속에 있으면서도 언젠가 이 순간을 부러워할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게 가속 페달을 밟아버렸다.




우리나라 원정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제주다. 제주도는 0순위 여행지로 그 자체의 매력으로 매해 찾던 곳이다. 거기에 축구까지 더하다니, 이만한 금상첨화가 어디 있나.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원정 경기, 설레고 두근거리는 표정을 품고 경기장까지 도착한다.


내 몸에 내 손이 닿았는데도 깜짝 놀라는 습한 여름이었다. 수영장 안 속에 들어가 두 시간을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땀나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화장은 다 지워지는 상상만 해도 구저분한 이 상황. 겉모양은 잠시 잊어두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응원가를 부른다. 뛰기도 하고 손도 흔든다. 거기에 골이 들어가면 일상에서는 절대 내지 못할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지른다. 점프와 손동작은 잦아지고 목소리는 더 커진다. 그렇게 터지는 도파민, 러너스하이가 아니라 풋볼스하이다. 이젠 중독의 시작이다.


전주에선 승리와 막걸리에 취했고 제주에선 승리와 맥주에 취했다. 선제골을 먹히고 두 골을 더 갚아주며 끝났다. 해트트릭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고귀함에 믿기지 않아 기쁘다면, 역전승은 기승전결이 완벽한 서사라 흥분되어 신난다. 카타르시스 그 자체다.


이런 날엔 곧바로 에어컨이 빵빵한 가게를 찾는다. 맥주 한 잔을 시키고 벌컥벌컥 마신다. 맛있는 안주를 먹으며 "아, 행복해~"를 돌림노래 하듯 돌아가며 부른다. 숙소로 돌아오면 하이라이트를 틀어 복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기분이 이어져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평화롭고 인자한 미소를 띠며 관광지를 즐긴다.


만약, 졌어도? 행복하다는 대사와 기쁨에 취한 표정은 제외하고 비슷한 루트로 그곳을 누린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앞에 두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나눈다. 이미 한 것 같은 얘기를 살짝 다르게 또 한다. 명단에 안 든 A 선수가 있었다면? B는? 더 나아가 아예 떠나 버린 사람까지 소환해 각자의 소견을 나눈다.


"에잇, 도돌이표 얘기야."라고 잠시 깨닫는다. 그런 날은 한숨이 돌림노래다. 그래도 생소한 그 지역의 분위기와 관광지를 즐기는 건 이기나 지나 마찬가지, 축구 여행의 필수 코스다.


그렇게 찾은 우리 강산이 전주, 제주도, 울산, 대구, 포항, 창원 등. 수도권, 충청도에 팀들이 몰려있는 2부에선 당일치기로 청주, 천안, 성남 등을 다녔다. 그 도시의 축구는 어떤지, 경기장은 어떤 모습인지, 편의점에는 무엇을 파는지 등을 살핀다. 살면서 축구 아니었으면 안 갔을 것 같은 도시들을 간절하게 취소표까지 구하며 간다.




멜버른에서였다. 워홀러로 지내던 멜버른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돌아갈까 말까로 고민하던 때였다. 그 시기 내 사랑 축구를 볼 수 있다 해서 친구들과 멜버른 AAMI 경기장에 찾았다. AFC 챔피언스리그라고 아시아 각국 클럽 팀들이 대결하는 대회다. 멜버른 시티와 반포레 고후의 경기가 열렸다.


경기장에 다다르니 보이는 일본 사람들. 본인 팀의 유니폼, 각종 굿즈를 온몸에 두른 그들. 설렘이 가득하고 낭만이 가득한 그들의 표정에서 누군가가 보였다. 일본에서 호주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어떤 머플러를 가져갈지, 누구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갈지. 짐을 싸면서 얼마나 신나게 고민했을까. 얼마나 큰 목소리로 팀을 응원해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을까.


시선은 그들에게 꽂혀 괜히 뭉클해졌다. 고후팀은 J리그 2부 소속이다. 2부 리그 팀이 1부 팀들과 수차례 대결 끝에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을 따낸 것이다. 거기에 2부 팀이 호주까지 와서 경기를 한다니. '우리 애 기죽으면 안 돼'라는 심정으로 휴가를 내고 돈을 모아 여기까지 왔겠지.


경기가 시작 됐다. 축구는 전 세계 리그에서 같은 노래가 다른 가사의 응원가로 쓰이기도 한다. 독일에서 들린 노래가 한국에서 들리기도 하고, 브라질에서 들린 노래가 영국에서 들리기도 한다. 서로 나눠 쓴다. 그래서 들렸다. 근처 고후 서포터석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수원의 가사가 들렸다.


제삼자로 보러 온 경기에서 갑자기 훅, 그리움이 사무쳤다. 가뜩이나 한국에 돌아갈지 말지 고민했는데. 괜히 외롭고 씁쓸한 마음도 있던 때였는데. 우리 팀 가사로, 수원에서 또 다른 도시에서 실컷 부르고 싶어졌다.


'안 돼, 나 축구 보러 가야겠어. 수원 응원하러 가야겠어!' 우리 팀 강등될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어. 아니, 보지도 못하고 소식만 들을 순 없어. 황당하고 충동적인 결정의 계기는 남의 팀 경기에서였다.


경기는 동점으로 끝났고 고후 선수들은 서포터들에게 다가갔다. 인사 후 대부분의 선수들이 들어가는데 주장으로 보이는 선수가 다시 팬들에게 돌아왔다. 차렷 자세로 마이크도 없이 엄청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친구에게 말했다. "이제 때가 온 거 같아. 집에 가야 할 시간이야. 내 팀 경기 보러 가야 돼." 친구는 "정말? 그 이유에서?"라고 물었다. 응, 확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멜버른이 아닌 수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모두 알듯이 2부 리그 팀이 되었다. 개막전만 가고 안 갈 거야!라고 배신감에 말했는데. 어느새 까맣게 잊고 이젠 창원까지 다니고 있네?


어쩔 거야. 이겨도, 져도, 무승부여도. 1부 아닌 2부여도.


그래도 내 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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