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꿈
공교롭게도 ‘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은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부모님들은 자기 아이가 얼마나 학교에서 잘하고 있는지 보러 오는 것이겠지만, 담임교사는 우리 반이 얼마나 잘 굴러(?) 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이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공개 수업 준비는 미리 차근차근 해 놓았었다. 한 시간 동안 어떤 수업을 전개하고 아이들과 어떤 문답을 이어갈지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학부모님들이 한 분 한 분 교실로 들어오시고 아이들은 자기 엄마가 왔나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엄마를 발견한 아이들은 눈을 찡긋하며 알은체를 했다. 웅성웅성 소란한 교실 분위기를 정돈하고 부모님들을 의식한, 한 톤 높은 목소리를 장착한 채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 주제는 ‘꿈 목록 만들기’였다. <존 아저씨의 꿈의 목록>이라는 책을 미리 읽고, 존 아저씨처럼 나만의 꿈의 목록을 작성해보는 시간이었다. 책에서 존 아저씨는 이런 말을 한다.
꿈은 네가 키가 크고 힘이 세지는 만큼 네 의지를 강하게 할 거야. 그래도 너무 힘들고 지칠 땐 잠깐 쉬어도 좋단다. 이루려는 꿈을 향해 좀 천천히 다가갈진 모르겠지만 그 길에서 넌 기대하지 않은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어. - 존 고다드, “존 아저씨의 꿈의 목록”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참 교사되기’나 ‘승진하기’ 같은 꿈은 아니었다. 그저 행복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을 꿈꿨다. 너무 추상적인 꿈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내 꿈은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다. 남들이 하는 것들을 나도 해보고, 남들 살듯 사는 그 과정을 나도 겪어보며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 그거면 만족했다. 물론 그 꿈이야말로 정말 원대한 꿈이라는 건 한참 뒤에 알았다. 나 또한 각자의 일터에서 지친 친구들과 입을 모아 ‘아 출근하기 싫다~’를 외치긴 했지만 암에 걸려 쉬게 되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다. 존 아저씨는 ‘힘들고 지칠 땐 잠깐 쉬어도 좋다’고 했는데, 힘도 있고 쌩쌩한 젊은이가 갑자기 쉬게 되어 버리니 다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아무렇지 않은 듯, “수술 잘 받고 더 건강해져서 돌아올게요!” 외치고 다녔다.
공개수업은 무사히 끝이 났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내가 전날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데 억지로 웃고, 즐겁지 않은데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수업이라기보다는 연기에 가까운 40분을 보냈다. 그것은 암 따위가 내 일상을 망칠 수 없다는 일종의 투쟁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암과 상관없이 수업을 무사히 마쳤고, 그 투쟁을 통해 내 일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당당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