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57만 원과 스물여섯의 엄마

첫울음, 나의 두 번째 탄생

by 다온홍쌤

결혼 직후, 저는 현실이라는 단단한 벽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남편의 월급 명세서에 찍힌 실수령액 ― 57만 원.

1998년의 일이지만, 그 숫자는 아직도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믿기지 않는 액수였고, 막막함이 밀려왔습니다.

집을 마련하겠다는 꿈을 놓을 수 없었기에, 저는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시골 장성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곤 수영과 유아 체육 실력이었지만, 스포츠센터조차 없는 곳이었죠. 결국 학습지 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영광까지 매일같이 오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살 같은 증상이 찾아왔습니다. 쉬면 나아지리라 생각했지만, 불길한 마음에 작은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의사는 자궁 외 임신일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머리가 하얘진 채 광주의 큰 병원으로 달려갔고, 다행히 오진이라는 결과를 들었습니다. 평범하고 건강한 임신이었죠.

기뻐야 할 소식이었지만, 제 마음은 복잡했습니다. 아직 집도 없고, 적금 만기도 채우지 못했는데 너무 일찍 아기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저녁에 남편에게 소식을 전했지만, 그의 첫마디는 “진짜야? 거짓말이지?”였습니다. 축하보다 먼저 제 마음을 헤아려주길 바랐던 저는 그 말이 평생 잊히지 않았습니다.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말은 “인생 조지려면 애 낳아라”였습니다. 시댁에서도 “어쩌려고 임신을 했냐”는 질책이 이어졌습니다. 모든 화살이 제게만 향하는 듯했고, 억울함과 외로움 속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임신 8개월까지 일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연애 시절부터 모아 온 적금 2천만 원을 만기까지 지켜냈습니다. 그 돈은 제게 유일한 기쁨이자 작은 승리였습니다.

이왕 낳는 것, 똑똑하고 예쁜 아기를 낳고 싶었습니다. 학습지 교사 일을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애썼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신기하게도, 배가 불러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 시간이 딸에게 전해졌는지, 우리 큰딸은 수학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지금은 화장품 회사 연구원으로 당당히 서 있는 커리어우먼이 되었지요. 딸을 볼 때마다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임신 기간 내내 잘 먹은 탓에 몸무게가 28kg이나 늘었고, 결국 8시간의 진통 끝에 제왕절개로 아이를 만났습니다.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몸 밖으로 꺼낸다는 것, 그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출산의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건, 열 달 동안 제 몸 안에 생명을 품고 살아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10개월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제 인생의 또 다른 탄생이었습니다.

스물여섯의 저는 그때 비로소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