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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길벗 소로우 Jul 21. 2019

깊은 기쁨

기쁨의 양과 무게에 대한 묵상

깊은 슬픔이라는 말은 있는데, 깊은 기쁨이라는 말은 없다.

슬픔은 아래로 내려가고, 기쁨은 위로 올라간다.

슬픔의 밀도는 기쁨의 밀도보다 크다.

그래서 슬픔은 가라앉는다.


슬픔을 품고 잔 사람은, 다음 날 일어나 보면 자신의 침대가 푹 꺼져 있음을 본다.

잠을 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쇳덩이를 품고 씨름을 하다 일어난 것이다.


슬픔은 무거워서 몸속으로 들어가면 잘 빠져나오지도 않는다.

며칠 전에 몇몇이 내게 해 준 칭찬과 기쁨의 찬사들은 그 이후 회상하지도 않고, 생각도 잘 안 난다.

지난 주에 누군가 해 준 어둡고 탁한 소리,  슬픈 비아냥 같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기쁨의 질량은 슬픔 질량의 10분의 1이기 때문이다.

슬픔 하나의 무게는 기쁨 열 개의 무게 정도 되고 영향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인간이 슬픔과 기쁨 사이에 중립을 유지하려면, 기쁨의 양과 슬픔의 양이 동일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중립에 멈춰 있기 위해서는, 기쁨 주입량이 이미 보유한 슬픔 총량의 열 배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슬픔을 없애는 데 있어, 기쁨의 양적 조절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슬픔은 밀도가 워낙 높아서, 참치 뱃속에 들어간 중금속처럼, 수십 년 동안 누군가의 뱃속 깊이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이왕 기쁨으로 속을 채우러면 기쁨의 종류도 바꿔야 한다.

슬픔보다 더 무겁고 깊은 기쁨으로 속을 채워야 한다.

깊은 기쁨으로 슬픔을 몰아낼 수 있다.


기쁨이 뱃속 깊이 천천히 가만히 가라 앉아,

무겁디 무거운 기쁨이 아래부터 깔리기 시작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슬픔은 점점 위로 떠오르고

그 슬픔은 마침내 입의 탄식으로, 혀의 노래로, 눈의 눈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깊은 기쁨을 찾을 이유이다.


쓰잘데기 없는 슬픔은 내 속에 들어와도, 감히 아래로 내려가 보지도 못하고,

잠깐만 머물다가, 붕 떠서 하릴없이 떠나 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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