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음악에 노래라는 단어를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밴드의 곡을 ‘노래’로 표현하면 왠지 정성 들여 녹음한 기타와 베이스와 드럼은 전부 사라지고 보컬의 멜로디만 남겨 놓은 기분이 들어서다. 메탈을 노래로 표현하는 건 특히 꺼린다(그렇다고 대체할 만한 표현이 있는 건 또 아니다). 다른 장르의 곡들에 비해 악기 연주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시도를 위해 고의로 악기 파트를 축소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드럼 기타 베이스는 각각의 기둥 같은 존재들이다. 좋아하는 곡들 중 몇몇은 단지 연주가 좋아서 듣는다.
해서 보컬의 가창력이 좋은 곡을 고르는 우선순위에 있지는 않다. 시종일관 보컬이 소리만 지르고 끝내는 곡들도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많다. 메탈 밴드들이 절규하며 가사를 내뱉을 때는 사실 일정한 멜로디가 없다. 그저 리듬에 맞춰 가사를 토해낼 뿐이다. 그러나 장르의 특성을 모르는 이들은 간혹 이런 ‘이게 노래야?’라는 말을 건넨다. ‘이게 노래야?’라는 말 안에는 때로 ‘이런 종류의 음악도 있나?’라는 신기함과 ‘이런 걸 노래라고 듣냐’라는 비아냥이 묘하게 섞여있기도 하다. 그때마다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고 “맞아, 이건 노래가 아니야”라고 말해준다. 보컬이 부르는 게 노래가 아닌 건 사실이니까. 메탈러들은 이런 창법을 그로울링이나 스크리밍이라 표현한다. 말 그대로 울부짖거나 비명을 지른다는 뜻이다. 이 두 창법은 음악의 3요소인 리듬, 화음, 멜로디 중 오로지 리듬만을 충족한다. 랩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랩을 랩으로 인식하는 시대가 온 것과 달리 그로울링이나 스크리밍은 여전히 “이게 노래야?”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정도랄까. “봐봐, 대신 나머지 악기들이 음악의 3요소를 채워주잖아!”라고 말하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맞습니다. 노래 아닙니다.
살면서 ‘이런 것도 노래냐?’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던 시절은 고등학교 때다. 한 번은 뒷자리에 앉은 친구가 내 mp3 플레이어를 궁금해 하기에 잠시 빌려준 적이 있었다. 플레이리스트에 소일워크와 헤이트브리드가 있던 게 생각나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줬다. 어차피 “넌 이런 걸 왜 듣냐?”라고 얘기하면서 돌려줄 게 뻔했으니까. 근데 그 날은 좀 달랐다. 플레이리스트를 훑어보던 친구가 뜬금없이 주다스 프리스트의 <Victim of Change> (Unleashed In The East 앨범 수록) 을 듣게 된 것이다. 곡 중간에는 보컬인 롭 헬포드가 고음으로 높게 지르는 구간이 나온다. 친구가 노래를 듣더니 “얘네 누구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주다스 프리스트의 대략적인 역사에 대해 알려준 뒤 추천 곡들을 적어줬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친구에게 그들의 노래를 다 들어봤냐고 물어봤다. 친구가 말했다.
“걔네보다 더 높게 올라가는 애들은 없냐? 스틸하트 쉬즈곤 같은 거.”
그리고는 교실 뒤쪽에서 시끄럽게 엠씨 더 맥스의 <잠시만 안녕>을 부르기 시작했다. 순간 김이 빠졌다. 애초에 메탈에는 단 1%도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고음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거기다 대고 롭 헬포드가 얼마나 전설적인 보컬인지, 이 곡에서 K.K다우닝의 기타연주가 얼마나 환상적인지 설명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때 좀 논다는 인간들은 왜 하나같이 교실 뒤편에서 노래를 불러 재꼈을까. 사실 그 목소리가 항상 싫었던 건 아니다. 그들의 발성이 마치 돼지 멱따는 소리와 같았으니까. 돼지 멱따는 소리가 무엇인가? 그렇다! 발라드 말고 차라리 데스메탈의 세계에 입문하는 건 어떠냐고 설득해볼까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남은 학교생활이 곤란해질 게 뻔했다.
사실 음악을 보컬의 멜로디로만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에 가장 할 말이 많은 건 메탈 뮤지션들이리라. 기자 지망생 시절, 모 매체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메탈 밴드 B의 멤버들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아까 말한 스크리밍과 그로울링을 앞세운 밴드였다. 멤버 중 절반은 본업이 있었는데, 회사에 다니는 멤버 A는 밴드를 한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뜬금없이 사가(社歌)를 부르게 됐단다. 무려 임원 및 부장급이 모인 시무식이었다. 그가 베이시스트였다는 건 함정. 자기는 베이스를 친다고 수차례 이야기를 했건만 왜 자신에게 노래를 시켰는지는 지금도 모른다고 했다. 그가 운을 떼자 나머지 멤버들이 각자 비슷한 경험이 하나씩 다 있다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터뷰 내내 서로 깔깔대며 웃었지만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멜로디 뒤에 깔리는 것들은 파트를 불문하고 반주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그래서 저는 남들 노래부를 때 뭔가를 먹습니다.
사실 노래방에 정이 가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말 그대로 그곳엔 음악이 아닌 노래만이 가득하니까. 누군가가 살면서 영영 노래방에 가지 말라는 형벌을 내린다면, 나는 아무 고통 없이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사실 내가 노래를 못 부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갖 정성으로 짜 놓은 연주들이 간주 점프 버튼 한방에 날아가 버리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프다. 사실 간주라는 단어 자체도 내게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 간주를 만들기 위해 체육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 아파트 3층 높이만큼 앰프를 쌓은 뒤 2주에 걸쳐 사운드를 잡는 밴드도, 아마존 원주민들과 수년간 생활하며 토속 리듬을 배워와 연주에 녹여내는 밴드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혼을 담는 작업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후딱 넘어가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속상하다. 사실 한국만의 현실은 아닐지 모른다. 세계적으로도 연주음악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빌보드 차트 1위를 했던 경음악은 서른 곡이 채 되지 않는다.
스낵 컬쳐가 문화 전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금, 메탈이 소구할 수 있는 대중적 요소는 많지 않다. 멜로디만 떼어다가 흥얼거리기도 어렵고, 장대한 구성과 큰 스케일 때문에 마디마다 토막 내서 소비하기도 애매하다. 훅으로 꽉 찬 3분짜리 노래도 길다고 느끼는 세상에 연주로 가득 찬 6분짜리 메탈이 인기를 끌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메탈은 청자에게 그 모든 연주와 서사와 구성을 온몸으로 즐기라 주문한다. 헤드뱅잉을 하고 누군가와 온몸으로 부딪치며 슬램을 할 수 있는 건 강렬한 사운드의 악기들이 꽉 들어찬 ‘간주’ 때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과정 지향적 즐거움이랄까. 그저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간주 점프를 눌러야만 하는 세계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쾌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목적 지향적인 인간은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이 늘 자랑스럽다. 오직 메탈만이 깨우쳐 줄 수 있는 즐거움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