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만나는 방법 (Feat. 김사랑)
제대로 음악을 듣고 싶을 때 거치는 몇 가지 절차가 있다. 우선 좋아하는 음악가의 투어 일정을 검색한 뒤 최근 공연 셋리스트를 찾아내 플레이리스트를 꾸민다. 이러면 실제와는 비할 바 못 되지만 공연을 본 기분을 조금이나마 낼 수 있다. 공들여 구성한 셋리스트에 맞춰 한 시간쯤 음악을 듣고 나면 그날 쌓인 스트레스가 풀린다.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장시간 이동할 때도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여기에 약간의 성의를 더하면 좀 더 신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일단 모두가 잠든 새벽,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좋다. 또는 기분 좋게 밤공기를 맞을 수 있는 곳을 거닐어도 좋다. 여기에 고가의 헤드폰이나 스피커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음악을 받아들이는 나의 감각이니까.
이건 사실 내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해준 말이다. 말하자면 나의 음악적 스승. 밴드부 기타리스트였던 친구는 서태지와 신해철만 알고 있던 내게 해외 록음악의 역사와 밴드들의 업적에 대해 알려줬다. 기타에는 장미나무와 마호가니 나무가 쓰이는데, 그게 어떻게 다른 특징의 제품이 되는지 알려준 것도 그 친구였다(내가 글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커뮤니티의 회원이기도 했다). 친구는 돈이 많았다. 집안에 돈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일본 직수입 청바지를 학교에 가져와 팔았기 때문이었는데, 얼마나 돈이 많았냐면 그때 돈으로 100만 원을 호가하는 일렉기타 아이바네즈 RG3120과 비씨 리치 JR V를 한 대씩 가지고 있었다. 거실에는 진공관 오디오가 있었으며, 내가 놀러 갈 때마다 양장피나 깐풍기를 아무렇지 않게 시켰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친구네 집에 놀러 가 진공관 오디오로 새로 나온 메탈 앨범을 들으며 중국집에서 시킨 요리를 얻어먹었다. 지금껏 살면서 누린 몇 안 되는 호사였다.
그날도 친구네서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으며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던 중이었다. 그러다 자신이 음악을 듣는 방법에 대해 말해 주겠다며 친구가 먼저 운을 뗐다. 모두가 자는 걸 확인한 뒤 방의 불을 끈다. 그다음 오디오에 헤드폰을 연결하고 귀에 꽂는다. 그리고 음악을 튼다. 그 다음은 음악이 모두 알아서 해줄 거라고 그가 말했다. 그때 꼭 들어보라며 친구에게 추천받은 게 스매싱 펌킨스의 2집 앨범 《Siamese Dream》과 쟈니 캐시의 곡 <Hurt>였다. 그 친구는 허세를 잔뜩 담아 자신이 알려준 방법이라면 우주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꼭 밤에 아무도 없을 때 들으라는 이야기를 같이 덧붙이면서.
솔직히 잘 와 닿진 않았다. 아무리 봐도 집에 30만 원짜리 헤드폰이 있어야만 가능한 놀이 같았으니까. 미심쩍어하는 내 눈빛을 읽었던 걸까. 친구는 중요한 건 자신의 감각이지 장비가 아니라며 한 번 더 힘줘 말했다. 사실 장비 말고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집안 자체가 고요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오기가 생겼다. 아니 뭐, 방도 없는 놈은 음악도 고상하게 들을 수 없단 말인가. 가정형편이 취미까지 규정짓는다는 망할 현실이 억울해 기어코 밤에 몰래 나와 빌라 옥상에 올라 워크맨을 틀었다. 이제 막 겨울방학이 시작된 때라 잠옷을 입고 옥상에 올라가니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추웠다.
괜한 오기였나 싶었지만, 친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아는 데에는 그 놈이 추천한 스매싱 펌킨스의 <Soma> 한 곡이면 충분했다. 낮은 볼륨으로 속삭이듯이 전개되다 어느 순간 드럼이 빵 터지면서 제임스 이하의 기타 연주가 이어지는데, 하필 그 부분에서 뜬금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이지 몽환의 끝이었다. 그때는 친구로부터 90년대 록음악과 70년대 히피즘에 대해 배우기 전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순간이 내 인생 최고의 사이키델릭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저 사이키델릭이라는 말을 알지 못했을 뿐. 매일 누군가가 술에 취해 울부짖는 유흥가 옆 동네였음에도 그때만큼은 세상에 혼자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아마 낮에 음악을 들었다면 눈이 온들 그만한 감동을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그 경험이 퇴근 후 나의 일상을 바꿨다. 특히나 지금 같은 여름엔. 보통은 자기 전 누워서 음악을 듣지만, 날이 더워지면 홀로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듣기도 한다. 어제는 혼자 밤길을 걸으며 김사랑의 《Behind the Melody》앨범을 들었다. 김사랑 하면 흔히 ‘나는 18살이다’ 라는 광고 카피와 <Feeling> 같은 발라드 곡을 떠올리지만, 사실 데뷔 때부터 그의 진가는 묵직한 뉴메탈(Nu-Metal) 사운드에 섬세한 감성을 넣는 데 있다. <취중괴담>은 그 정점이다. 신나게 한 잔 마시고 모두 잊자는 내용의 노래다. 내가 이 곡을 좋아하는 건, 술을 소재로 한 여느 노래들 마냥 청승맞거나 오글대지 않아서다. 초반에는 가벼운 리듬이 이어지며 “이런 날엔, 이런 밤엔, 맘을 비워, 머릴 식혀”라는 가사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그 다음 “모두의 희망을 담은 채 축배”라는 후렴구가 나오며 묵직한 트윈 기타 연주가 이어진다. 신나면서도 몽환적이다. 한 잔 마시자는 노래에 나도 빠질 수 없어 편의점에서 도수가 제일 낮은 KGB레몬을 사들고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자정이 넘은 시간 일산에서는 십여 분을 걸어도 맞은편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아는 한, 도시에 사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는 밤에 있다. 여름 내내 나는 그 자유를 만끽한다. 가을이 오고 날이 추워지면 술은 입에 대지 않는다.
밤에는 모든 감각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밤이 깊어지면 멀리서 날아오는 담배냄새도 짙게 느껴지고, 5월 중순의 밤바람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여름 냄새를 읽어낼 수 있다. 한낮에 벌어진 사소한 일들을 새롭게 곱씹을 수 있는 시야가 생기고, 부질없는 가정으로 뒤늦게나마 과거를 바로잡을 수도 있다. 그 순간 각자는 타인과 다른 영역을 갖는다.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넘어 남들에게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다. 그건 어느 나라 첩보기관의 교범에 적혀있듯, 그때가 인간이 가장 나약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한 존재였다면 아마 무엇을 느끼든 상관없겠지. 스스로가 강하다면 굳이 주변을 느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뭐든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둔감하기 짝이 없는 건 그래서이기도 하다. 그건 한편으로는 크나큰 불행이다. 그 어떤 일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리 힘이 세도 골렘이나 트롤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잠든 밤 스스로가 외롭고 작게 느껴진다면, 오히려 그건 축복에 가깝다. 진정 그때야말로 우주를 체험할 기회니까. 모두가 잠든 밤, 음악을 듣는 데 필요한 건 고가의 장비가 아니다. 그보다 필요한 건 나약함과 고독,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마음들이다. 우리가 나약해질수록 음악은 우주 복판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 시간엔 잠시 그래도 괜찮다. 오직 혼자만 아는 시간이니까. 오직 나조차도 모르는 그 마음이 나를 살아있게 하니까. 각자가 도시의 소란스러운 낮을 버티며 살아낼 수 있는 건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