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명절 무렵 TV에서 공항이나 터미널의 모습을 봤을 때가 그렇죠. 마트에서 태국산 망고스틴이나 필리핀산 망고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자연스럽게 방콕과 마닐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살면서 한 번도 태국과 필리핀에 가 본 적이 없지만요. 어쨌거나 그곳에서 온 과일들이 눈앞에 있으니까요. 일종의 증거랄까요. 1000km 떨어진 곳에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요. 살면서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그곳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겁니다. 그물을 타고 올라와 차에 실린 뒤 터미널과 공항을 거쳐 내륙 어딘가로 오게 되는 거죠. 그걸 본 이들은 한 번쯤은 바다를 떠올릴 겁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저 상상으로 끝내고 마는 저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정말 바다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내 멀리 떠나는 이가 있다는 것이겠죠.
역촌역에 내리는 순간, 말들이 달렸을 과거의 의주길을 상상한 건 그래서 였을까요. 지명 탓에 사전 조사를 하지 않아도 이곳이 예전에 역참이었음을 알 수 있었어요. 은평구에는 그런 지명이 많습니다. 구파발도 그렇죠. 생각해보니 모두 말과 관련된 이름들이네요. 문득 말들의 관절이 걱정됐습니다. 예전에는 고양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대부분의 길들이 모두 산길이었을 테니까요. 정확히는 길이 나 있는 고개 들이었겠죠. 급한 전보나 어명을 전달할 때에는 밤낮없이 달렸을 텐데, 가로등 없는 산길을 대체 어떻게 달렸을지 아득합니다. 재수가 없어 밤에 호랑이를 만났을지도 모르죠.
너무 몰입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길을 상상할 수 있는 건 제가 나고 자란 고양시 고양동에 의주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역참과 연결된 길이죠. 그 의주길 중 일부는 현재 혜음로라는 도로명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 혜음로를 따라가면 파주시와 고양시의 경계에 혜음령이라는 고개가 나옵니다. 지금은 터널이 나 있지만 예전에는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가야 했습니다. 폭이 좁고 가파른 길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도적떼가 많아 고개 근처에 혜음원이라는 숙박시설을 따로 지었을 정도죠. 본래는 절이었으나 역참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예전에 실제로 가보니 규모가 작지 않았어요. 숙박시설과 종교시설, 왕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 터도 함께 갖춰져 있을 만큼 컸습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한 통로였던 셈이죠. 그 모습을 토대로 역촌동 어딘가에 있었다는 역참을 상상해봤어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요.
음악을 들으면서 구산동 방면의 큰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5분쯤 걸어가니 작은 표지석이 하나 보였어요. 옆에 오토바이들이 세워져 있어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표지석에는 ‘연서역터’라는 큰 글씨 아래 ‘조선 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 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역터’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역참의 이름이 연서역(延曙驛)이었군요. 새벽을 이끄는 역이라니. 왠지 공중파 방송사의 새벽 5시 뉴스 카피를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곳이 한양 이북의 첫 번째 역참이라 이런 이름이 붙은 걸까요. 이 역참은 북방에서 벌어진 소식들을 한양에 전해주는 역할을 맡았을 겁니다. 여명을 헤치고 북방에서 달려온 파발마가 “여진족이 압록강을 넘었다!”나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따위의 소식을 싣고 왔는지도 모르죠. 안타깝게도 조선시대에 접어든 뒤 역참은 무역 창구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관료들이 역참의 준마들을 사유화하며 국가통신망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하죠. 그 이후에는 당연히 세상 너머를 상상하거나 꿈꾸는 일도 사라졌겠죠.
잘 아시겠지만 국가 운영에 역참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한 건 몽골 제국이었습니다. 당시의 역참은 외부의 소식을 전하는 동시에 무역 창구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죠. ‘몽골 군이 키예프 공국과 전쟁을 시작했다’따위의 외부 정세가 역참에 전해지면 이곳에 머물던 상인들도 급히 목적지를 수정했겠죠. 돈이 되는 소식 역시 그 안에서 오갔을 겁니다. ‘요새 물개 가죽이 돈이 된다며?’ ‘프랑스의 귀족들이 수코타이 왕국의 후추를 좋아한다던데?’ 같은 이야기들이요. 동아시아를 유럽에 소개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폴로 자신도 실크로드의 상인이었고요. 모두 정확하진 않았겠지만 이들에게 소식은 곧 돈이었을 겁니다. 이미 그 시절부터 물자와 뉴스가 함께 이동한 셈이죠. 역참 안에서 입체적인 뉴스 네트워크가 형성된 겁니다. 이렇게 전해진 뉴스가 교역로와 물자 이동, 그리고 유통되는 상품에도 영향을 줬겠죠.
지금의 세계화 역시 그 연장에 있습니다. 각국의 교역물자가 비행기와 배를 타고 오가는 것만큼이나 해외의 수많은 뉴스들이 각국의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되죠. 이는 바로 투자자들의 운명을 가릅니다. 초단위로 수백 조원의 돈이 오가는 21세기에서 뉴스는 투자와 거래의 이정표가 됩니다. 오가는 액수가 많아질수록 뉴스는 더 빠르고 치밀하게 시민들의 일상에 침투하죠.
이러한 세계의 문제는 지구의 수없이 많은 소식들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접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해야 할 때가 생기죠. 무심코 클릭한 기사에 불쾌함을 느끼고, 그렇게 올라간 조회수는 언론사의 광고수익이 됩니다. 세상의 모순에 분노하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내가 왜 굳이 이 소식을 접해서 화가 나야 하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방역수칙을 위반한 취객이 난동 끝에 경찰에게 붙잡혔다는 따위의 뉴스를 접할 때 말이죠. 오늘 제게 있어 최고의 뉴스는 비가 그친 뒤 부는 바람이 너무 시원하다는 것. 어제 큰맘 먹고 산 유기농 초콜릿이 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좋다는 것. 그 두 가지예요. 그리고 오늘만큼은 제가 걸으며 느끼는 것들이 이 세상의 전부이기를 바랍니다.
연서역터를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오래된 주택가들이 이어져 있었어요. 1980년대 즈음에 지어진 듯한 건물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살던 동네의 골목 같았어요. 굵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박힌 좁은 보도에 10년은 족히 지난 듯한 치킨집 간판이 때가 묻은 채 걸려 있었습니다. 거기서 10분 정도를 더 들어가니 초등학교 앞이었어요. 그 앞에 있는 분식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가게는 한산해 보였어요. 철판에서 끓고 있어야 할 떡볶이도 보이지 않습니다. 구석 테이블에서 아이 둘이 라면을 먹고 있었고, 사모님은 TV를 보면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계셨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분식집에서 컵 떡볶이나 라면을 사 먹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왜 아이들은 유독 싼 음식을 좋아할까요. 여러 가지 음식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이들의 완고함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짜장면이 그렇죠. '짜장면 말고 뷔페가 더 맛있는 게 많은데?'라고 설득해도 여전히 짜장면! 을 외치면 당황스럽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때로 존경스럽기도 해요.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주저 없이 선택합니다. 일말의 후회도 남기지 않고요.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 어느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인가를 저울질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더 가성비가 좋은지 먼저 따지는 저는 과연 어릴 때에 비해 얼마나 행복해졌을까요. 저도 이제부터는 단호하게 짜장면을 고르는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근처를 벗어났습니다. 이번 주에는 반드시 중국집에 가야겠어요.
학교를 벗어나 10분쯤 걸으니 다시 넓은 길이 나왔습니다. 주택가 바로 앞에 재래시장을 겸하는 상점가와 식료품점이 있고 동네 사람들만이 이용할 것 같은 카페와 공방들이 붙어 있었어요. 이 모든 게 집들과 2,3분 거리 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들이 많은 동시에 유흥시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거리가 생각보다 조용하고 깔끔했습니다. 블록 사이사이에 소떡소떡이나 핫도그 같이 아이들이 군것질하기 좋은 가게들이 있어 하나씩 들어가 보고 싶었어요. 역촌동 안쪽을 돌아다닐수록 동네가 마치 파뿌리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돈되지 않은 구획에 주택가와 시장, 마을 공동체 시설이 한데 얽혀 있는 느낌이었어요. 처음 동네에 와본 외부인의 시선에선 그 모습이 평화로운 동네의 전형 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일부러 외형을 귀엽게 꾸며 시선을 끄는 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필요를 온전히 제공하는 가게들이었어요. 이를테면 유산균 빵을 전문으로 만든다는 제과점이나 잡채밥을 앞세운 퓨전 중국집이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이런 가게들이 있다면? 그 사소함이 주는 행복은 결코 작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는 이곳에 또 오리라 다짐하며 큰길로 빠져나오니 건너편에 이마트 응암점이 보였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응암동인가 봅니다. 역촌동과는 분위기가 또 달랐어요. 넓은 길들이 동네 곳곳을 관통하면서 양쪽으로 오피스텔 단지와 음식점 거리들을 갈라 칩니다. 이런 구조가 계속 이어져 있었어요. 같은 패턴의 길이 죽 이어져있다 보니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새하얀 카페가 눈에 들어왔어요. 무려 모히또를 주력으로 팔고 있었습니다. 덥고 습한 날씨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바로 가게에 들어가 모히또를 시켰습니다. 짓이긴 민트의 향이 대단했어요. 하얀 바탕의 카페와 나른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모히또와 잘 어울렸습니다. 단숨에 마시고 싶은 충동을 참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더위를 가라앉혔습니다.
그러다 문득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히또 속 라임 말이죠. 분명 국산은 아닐 테고, 멕시코 아니면 미국에서 왔을 텐데. 어쩌다 이 라임은 태평양을 건너 서울의 작은 동네 카페로 팔려와 모히또가 됐을까요. 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이 라임의 기이한 여정에 대해 잠시 생각했습니다.
사물의 여정을 곱씹어보는 것도 여행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세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여정의 결과물입니다. 이 테이블의 목재도 사실은 인도네시아가 고향 일지 모르죠. 미국의 여행 작가 롤프 포츠는 자신의 책 <여행의 기술>에서 베거본딩에 대해 정의합니다. 여기서 베거본딩(Vagabonding)'이란 방랑, 유랑을 말하죠. 그는 유랑을 물리적 이동을 넘어선 삶의 자세라고 이야기합니다. 잠시 어딘가로 다녀온 뒤 전혀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산다면, 이는 일회성 일탈일 뿐이라면서요. 그는 일탈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여정을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반드시 물리적 이동을 뜻하지만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정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세를 의미하죠. 인간이 현재 일궈 내고 있는 역사란 곧 사람과 사물의 여정, 그 자체니까요.
그 사실을 상기한다면 오늘의 방랑 또한 여행이 아닐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역촌역에서 역참의 모습을 상상하고,처음 보는 카페에 무작정 들어온 뒤, 아메리카 대륙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모히또가 된 라임의 여정을 생각하는 일 말이죠. 이는 우리가 세계의 일부인 동시에, 우리 안에 세계의 일부가 있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지금, 이 또한 여행의 일부일 수 있어서 다행이고, 또 기쁩니다. 떠날 수 없는 자의 정신승리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