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대학살 국제 반성의 날
1965, 인도네시아 대학살
“한국 정부는 사과를 한 건가요?”
4.3 평화 공원을 돌아보던 구룬이 물었다. 내가 답하자,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직전 작은 소동이 있었다. 추모객들 사이 백발의 노인이 손글씨로 적은 피켓을 들고 큰 소리로 시위를 하다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한 것이다. 학살 이후 반으로 나뉘어 버린 땅. 희생자들에 대한 박해와 낙인찍기, 차별에 대해 그도 이해하고 있었다.
호주에서 온 구룬은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인 다당 크리스탄토는 8살 때 인도네시아 대학살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실종과 대량학살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세계적 민중예술가 작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부터 6개월간 벌어진 대학살로 50~300만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20세기 최악의 대학살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1965년 대학살’은 여전히 금기어라고 한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어느 정부도 사과하지 않았다.
때늦은 한파에도 불구하고 겨울 동안 숨겨져 있던 싱그러운 빛깔들이 얼굴을 내밀고, 나무들은 분홍빛 꽃이 만개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이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4월은 찬란하게 아름답지만, 아름다움만 논하기에 추모해야 할 날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제주 4.3,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2013년 4월 1,136명의 목숨을 앗아간 방글라데시의 라나플라자 참사, 1975년 4월 캄보디아에서 시작된 대학살까지, 4월은 분노와 슬픔, 아픔을 비롯한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켜져 있다.
어느 해인가, 친구의 SNS 게시물에서 'Kwibuka(퀴부카)'라는 낯선 단어를 보았다. 르완다는 대학살 이듬해인 1995년부터 매년 4월 초 한 주간을 추모 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추모 행사를 열며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퀴부카는 르완다의 키냐르완다어로 '기억하다'라는 의미로, 르완다 대학살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추모의 의미로 쓰인다. 영화 <호텔 르완다>를 통해 르완다 대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내 기억 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때 잠깐의 분노와 슬픔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자, 내 무관심에 부끄러워졌다.
20세기 초,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실시한 벨기에의 인종 차별 정책은 독립 이후에도 영향을 미쳐 결국 르완다를 완전히 두 동강 내어버렸다. 종족 간 갈등은 1994년, 정점으로 치달았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을 태운 전용기가 알 수 없는 공격을 받아 추락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다음 날부터 극단주의적인 일부 후투족은 피의 복수를 외치며 투치족에 대한 학살을 시작한다.
약 100일 동안 지속된 학살로 투치족 80만여 명과 온건파 후투족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에 1만 명 정도가 살해된 셈이다. 르완다 대학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인류 최악의 인종청소’로 꼽힌다. 식민정책에 의해 시작된 이 학살은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대학살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음에도 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실질적인 개입을 거부하고 이를 외면했다. 이후 2004년 유엔과 국제사회는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외면했던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4월 7일을 ‘1994년 르완다 집단 학살 국제 반성의 날’로 지정했다. 1994년 발생했던 르완다 집단 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며, 다시는 인류의 비극에 외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반성의 날인 것이다.
르완다 대학살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엄청난 규모에도 있지만, 평범했던 개인들이 저지른 학살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목에 마체테를 겨누고, 누이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자는 군부도, 외부에서 침범한 적도 아닌 낯익은 동네 주민이었다. 아이들마저 학살에 가담하지만,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평범했던 대중이 한 순간에 이웃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학살자로 변할 수 있었고, 단순히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칼을 겨눌 수 있었을까? 그 광기 어린 학살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많다. 다행히 광기 어린 학살 이후 들어선 새 정부의 재건과 해결의 노력은 눈여겨볼 만하다. 후투와 투치 출신을 균등하게 각료로 임용하고, 곧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학살자들에 대한 보복 대신 ‘르완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해 종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힘을 썼다. 화합을 명분으로 어설픈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대학살과 전쟁범죄 등 반인류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철저히 처벌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학살 재발 방지를 위해 힘썼다.
학살 있던 곳은 학살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박해와 낙인찍기, 차별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받는다. 이런 차별과 쓸모없는 구분 짓기 등으로 인해 제노사이드 이데올로기가 다시 르완다를 휩쓸지 않도록 차별을 야기할 수 있는 구분에 근거하는 정치조직은 허용되지 않는다. ‘투치’, ‘후투’라는 단어 역시 금기시한다.
르완다 대학살 25주기를 맞은 올해는 4월 7일부터 7월 4일까지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화해와 단결, 재건을 위한 열망 담아 100일간 추모를 이어간다. 르완다의 사람들은 대학살을 기억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끔찍한 비극을 잊는 대신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그들은 기억하고 이야기하며 대학살을 기억한다.
며칠 전 인도네시아 대학살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실종과 대량학살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세계적 민중예술가 작가인 다당 크리스탄토가 제주 4.3 미술제에 초대되어 제주를 찾았다.
4월 3일 제주 4.3 미술제의 오프닝에서 다당은 직접 수집한 4.3 학살터의 흙과 인도네시아 학살터의 흙을 한데 모아 섞었다. 당신들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이 다르지 않다고, 함께 추모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 퍼포먼스는 꽉 움켜쥔 주먹을 하늘 높이 들며 마무리됐다. 그 모습은 마치 르완다 대학살 극복과 화합의 상징인 희망을 상징하는 불이 켜진 촛불을 손으로 드는 행위와 같았다. 그리고 ‘모든 아픔에 귀 기울여라, 그 아픔들에 공감하고 아픈 이들과 연대하라’, ‘그러한 아픔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전 세계의 모든 이를 위한 평화의 목소리를 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4.3과 인도네시아 그리고 르완다 대학살 등 과거의 아픔을 꺼내고 여전히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통해 우리가 전해 들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광기 어린 학살들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같은 말을 한다.
‘안타깝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나의 일이 아니라고....’ 25년 전 르완다 대학살이 TV를 통해 전해지던 때에도, 시리아와 예멘, 그리고 로힝가의 비극이 전해지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는 무기력하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너와 나를 구분 짓는 순간, 분열은 시작되고 악마는 깨어난다. 나의 고향을 휩쓸었던 광기가 전 세계를 돌고 돌아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들만의 아픔,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전 인류의 아픔이며, 우리 모두의 비극의 역사다. 지금 목소리 내고 멈추지 않는다면, 아픔은 계속된다.
4월,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아픔을 기억해야 한다.
보태기 | 이 글은 독립문화예술매체 <씨위드 Seaweed >에도 중복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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