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방글라데시 ⑤ 로힝가 난민과 방글라데시 고산족, 줌머인
코로나와의 사투가 시작되기 전인 올해 1월, 일주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방글라데시에 다녀왔다. 5년 만에 방문이었다. 올해 다시 방글라데시에 방문할 일정을 계획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코로나로 인해 다시 기약 없는 약속이 되어버렸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데, 방글라데시 여정을 정리하는 게 조심스러워 미루다 보니 어느덧 여름이 되어버렸다. 더 늦기 전에 정리를 해둬야 할 것 같아 사진도 다시 꺼내 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메모를 모았다.
난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다시 방글라데시에서 살게 된다면, 콕스바잘에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마트나 슈퍼마켓이 없어 냉동 뽀로타(Paratha, 팬에 납작하게 구운 빵으로 커리와 같이 먹는다. 페이스트리처럼 여러 겹이 얇은 결이 생기는 게 특징. 냉동 뽀로타만 있으면 집에서도 간단하게 현지식은 물론이고 피자도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애용했다)를 살 수 없다는 게 큰 단점이긴 하지만, 수도에 갈 때 잔뜩 사서 오거나 근처 괜찮은 뽀로타 집을 찾으면 되니까... 콕스바잘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공항이 가까이 있어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좋았다. 평생 바다를 가까이 두고 당연한 풍경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방글라데시에서 살았을 때 아무리 강이 많아도 바다를 볼 수 없는 답답함은 꽤 견디기 힘들었다. 릭샤(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울창한 나무 터널이 있는 도로를 달리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집으로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게 하는 편안함이 좋았다. 작은 도시에서 느껴지는 고즈넉한 느낌 말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소수민족이 터를 잡고 있어 다양함에서 느껴지는 생동감도 좋았다. 콕스바잘은 여유롭고 평화로우면서 조화롭고 다양했다. 덤으로 싱싱한 해산물도 구할 수가 있다. 나는 그냥 콕스바잘이 좋았다. (종종 세상 물정 모르는 외국인으로 보고 엄청난 바가지를 씌우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난 충분히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찾은 콕스바잘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공항에서 작성해야 했던 도착 신고서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아니었다. 여유가 느껴지던 한적한 도로는 더 이상 없었다. 도로에는 차가 비어 있는 시간이 없었고 특히 국제기구 마크가 새겨진 밴 차량이 눈에 띄게 많이 드나들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사이렌 소리가 도로를 채웠다. 분명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긴장감이 느껴졌고, 삭막함이 맴돌았다.
‘난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만나는 사람마다 로힝가(로힝야) 난민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우리의 의견이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는 그들의 의견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답변 대신 그들에게 되물었다. 인구 50만의 작은 도시를 두고 100만 명의 난민이 거주하는 대형 난민캠프가 형성되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난민 캠프와 캠프 주변의 식수가 오염되고 숲이 사라지는 환경문제뿐 아니라 마약(야바) 및 무기 밀매, 성매매 등 강력 범죄 또한 함께 늘었다. 치안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졌는데, 특히 소수민족이 느끼는 불안감은 매우 컸다. 그들은 방글라데시에서 주류를 이루는 벵골인(98%)과 달리 외형적으로는 남아시아 쪽보다는 동남아시아에 더 가깝고 종교도 이슬람교가 아닌 불교나 기독교를 믿는 이들이 많으며,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다시 이방인이 되어버린 줌머족
인도,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방글라데시 남동쪽 지역에 위치한 치타공 고산지대(CHT, Chittagong Hill Tracts)에는 짜끄마족, 라카인족, 뜨리뿌라족 등 11개 소수민족 75만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을 줌머족이라 부른다. 이들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는 국가에 편입되지 않고 오랜 세월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이 떠나고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이 지역을 차례로 지배하면서 자치권을 잃었다. 1971년 파키스탄의 탄압에 맞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함께 싸웠지만, 독립 이후 돌아온 것은 차별과 탄압이었다.
1979년부터 5년에 걸쳐 정부는 약 40만 명의 벵골인들을 치타공 산악지대로 이주시키는 이주정책을 펼치고 줌머족의 토지는 몰수했다. 줌머족은 정책적으로 배제되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차별과 인권 탄압을 받았다. 1980년부터 평화협정이 체결하기 전까지 13번의 대학살이 있었으며,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줌머족은 계속해서 민족 자치권을 위해 투쟁했고 1997년 비로소 방글라데시 정부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정부는 약속한 평화협정의 조항들은 이행하지 않았다. 여전히 줌머족은 민족 자치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콕스바잘은 치타공 고산지대를 제외하고 방글라데시 내에서 줌머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로힝가 난민 사태 이후, 무슬림이 아니면서 벵골인에 속하지 않은 줌머족은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로힝가 난민과 비슷한 아픔의 역사를 겪어왔지만, 역설적이게도 로힝가 난민 사태의 영향으로 이들의 입지는 더 줄어버렸고 안전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많은 사람이 로힝가 난민 대거 유입 이후 2012년 발생한 콕스바잘의 불교도 마을인 ‘라무 습격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2012년 9월, ‘라무’라는 불교도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마을 청년의 페이스북에 코란을 모독하는 사진이 올라왔다. 이를 본 무슬림들은 격분했고 그날 밤 성난 수천 명의 무슬림들이 라무로 달려가 의해 마을의 가옥과 불교사원에 불을 질렀다. 작은 마을은 금세 불바다가 되었다. 불교 사원 20곳과 가옥 50채가 불에 타 전소되고 천여 명의 주민들이 마을에서 대피했다. 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페이스북의 사진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짧은 시간 조직적으로 수천 명이 몰려든 점과 이 습격 사건에 로힝가가 포함되어 있어, 미얀마에서 벌어진 학살과 탄압의 결과가 엉뚱하게 방글라데시 불교도와 소수민족으로 불똥이 튄 게 아니겠냐는 여론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공존의 딜레마
난민캠프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아 친구들과의 대화도 난민 이슈로 이어졌다. 난민 사태 이전부터 난민캠프에서 활동하던 친구들도 많았지만, 난민 사태 이후 캠프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늘었다. 난민사태 이후 콕스바잘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나 NGO가 늘어나자, 콕스바잘 주민들에게도 다양한 기회와 일자리가 늘어났다. 2015년 아트페스티벌에서 학생 도우미로 함께 했던 친구도 졸업해 UN 산하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했다. 지역에서 로힝가 난민을 위한 NGO도 새롭게 많이 만들어지는 등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었다. 아트페스티벌을 함께 했던 다다나 예술가들도 국제 NGO의 기금을 받아, 우리가 몇 년째 말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그림책도 출간했고, 캠프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이곳에서 로힝가 난민 이슈는 양날의 칼일 수밖에 없다며 난민과의 공존에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들을 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콕스바잘은 지리적·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변방 지역으로 지역 내 지원이 난민에게만 집중되어 있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주민 또한 적지 않았다고 했다. 난민들이 캠프를 밖을 나가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몰래 캠프를 벗어나 주민의 생활 영역과 경제 활동을 침해하는 일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임금이 하락했고, 사람들의 삶은 더 팍팍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구호 단체들의 활동과 지원으로 난민 캠프는 많이 안정화되어 가고 있었지만, 콕스바잘 주민들은 난민사태 이후 삶이 더 힘들어졌다고 호소했다.
난민 보호와 지원에 대한 원칙은 변함이 없지만, 방글라데시의 상황은 열악했고, 콕스바잘에서의 상황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난민사태 직후 미얀마와 협상에서 난민 조기 송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실제 송환이 몇 차례 무산되면서 로힝가 난민의 방글라데시 체류가 사실상 장기화됐다. 로힝가 난민과 콕스바잘 주민과의 공존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로힝가를 본래 자리로 안전하게 돌려놓기 위한 노력도 물론 필요하지만, 국가 권력과 주류에 의해 박해받던 로힝가 난민과 콕스바잘의 소수민족의 안전한 공존을 위한 노력도 필요해졌다. 이들의 공존을 위해 국제 사회,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무엇이 있을까?
줌머족에 대한 탄압의 역사
줌머인들에 대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토지 약탈, 조직적이고 집단적 폭력과 살인, 종교 및 인종·문화말살정책, 인권탄압이 이뤄졌다. 평화협의 이전에 13번의 대학살이 있었으며, 1980년에서 1997년 사이에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줌머인들은 ▲‘평화협정’ 이행▲치타공 산악지대 자치권 인정▲군대철수▲군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철저한 조사▲치타공 산악지대 내 벵갈리 정착민 철수▲종교탄압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배 시기, 국가 제도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상태로 유지
1920년, 영국 식민 당국, CHT 지역에 대해 '예외 지구'로 선언 (전통적인 족장 통치구조 인정)
1947년 이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파키스탄에 편입
1959~1963년 캡타이 댐 건설로 CHT 상당 지역 수몰로 10만 명 난민 발생(인도로 망명)
1962년, 파키스탄 정부, CHT지역 예외 지구로 지정되었던 법안 폐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줌머인, 방글라데시 독립군으로 활동
1972년, 방글라데시 정부, CHT 지역 민족 자치권 요구 거절, 줌머족 PCJSS 정당 창당
1973년, 무장조직 샨티바히니 (SB) 조직, 방글라데시 정부, CHT 지역에 군 배치(고문, 강간, 살해와 인권 탄압이 어어짐)
1976년, 방글라데시 군대에 대한 게릴라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
1978~1984년, 벵골인 이주정책으로 40만 명 벵골 무슬림이 치타공 고산지대로 이주
1994년, 줌머인 한국으로 첫 망명
1997년 12월, 방글라데시 정부와 평화협정 체결, SB 해산
1998년, CHT지역위원회법이 통과
1998년, 연합민족민주전선 (UPDF) 창당
2007년 1월 11일, 비상사태 선포 후, CHT 이주정책 강화
2012년, 불교도-무슬림 간 유혈 충돌로 20만 명의 로힝가 난민, 방글라데시 유입
2012년 9월, 콕스바잘 불교도 마을 라무 습격 사건
2017년, 방화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된 줌머인 학생연합 지도자 로멜 자끄마 고문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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