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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우리의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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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Dec 03. 2021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가 필요해

우리의 3시 | 표현되지 못한 마음에 대하여

얼마 전 한 프로그램을 통해 성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문화예술계에 활동하는 기획자들과 함께 문화 현장에서 각자 경험했던 성차별의 경험과 성평등한 문화를 만들기 위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사실 섭외 전화에 '오랜 시간 현장에서 목소리 내온 분들이 더 적합'한 것 같다며 에둘러 거절을 했었다. 하지만 강의가 아니라 다 함께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자리라는 말에 더 적합한 핑계를 찾지 못해 함께 하게 되었다. 이 글은 그 행사에서 했던 말을 담았다기보다는 그전까지 고민해왔던 생각과 마음들을 정리해둔 것이다. (사실 행사에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고, 끝나고 나니 못한 말들만 한 가득했다. 이렇게 할 말이 많았는데, 할 말이 없어서 거절했다는 것은 애초부터 눈에 보이는 핑계가 맞나 보다.)



나의 경우 성평등 이슈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조혼, 인신매매, 성노예, 할례, 염산테러, 차우파디, 신부 불태우기, 젠더사이드 등 범지구적인 문제에서부터였다. 앞서 나열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마 남성과 여성 대결 양상 없이 모두가 ‘잘못된 일’이며, 해결해야 할 인류의 숙제라는 것에 동의할 거다. 하지만 우리 사회 속 성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도 의견이 갈린다. 나 역시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평등 이슈는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몇 해전이었다. 비싼 생리대 값으로 인해 신발 깔창과 휴지를 생리대로 사용한 이른바 ‘깔창 생리대’ 사연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다른 곳도 아닌 '우리' 나라, 한국의 이야기였다. 마침 젠더이슈로 대학 특강을 나가기로 한 날이었고, 그날 강의에도 생리 빈곤에 대한 내용이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준비했던 내용은 우리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 사회 속 성차별 이슈는 인지조차도 못하고 있으면, 인권에 대해 목소리 내고 지구촌 이슈에 대해 관심을 촉구하던 지난 내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결국 강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내용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젠더이슈를 공부하고 학생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일상에서 크고 작은 편견과 차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 사회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후 우리 사회가 성평등 이슈를 지나치게 시혜적인 시선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쪽의 성별이 자신이 누려야 할 것을 포기하고 양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학습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이 일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피해의식 혹은 우월적 위치를 나타내 또 다른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무엇보다 차별과 혐오가 '잘 몰라서' 혹은 알면서도 '별 거 아니'라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통용되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에서 혐오와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는 폭력의 범위를 너무나도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고 제대로 폭력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기 때문일 수 있다. 여전히 안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침묵을 택한다.


사실 프로그램 참여에 거절은 한 이유는 사실 자격과 깜냥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성평등의 이슈가 남녀 성 대결 양상처럼 충돌해야 하는 민감하고 어려운 주제라는 생각 때문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나서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수락은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뒤늦게 행사가 현장에서 생중계까지 된다는 말에 더욱 내 마음은 심란해졌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나친 조심스러움, 이러한 내 자세가 이미 내재한 편견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많은 조직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는데.... 성차별의 경험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요즘은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알면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 말아야 될 말을 알면서도 기어코 내뱉고 나야 직성이 풀리는 위인들이 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럽지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괜찮은 사람들.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듣는 것을 보면 단지 '몰라서' 성차별이 발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말 자체가 동시에 많은 말을 닫아버리게 하는 말인 것을 생각하면, 그 말 자체가 또 하나의 거대한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불쾌했고 주변에도 함께 분노했던 상황이었는데 막상 다시 내입으로 내뱉기엔 뭔가 옹졸해 보였다. ‘농담’ 혹은 ‘칭찬’인데... '겨우 그런 것 가지고....', '이제 와서...' 단순히 자격지심의 문제였을까?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람,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 불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일상에서 말을 찾지 못한 많은 마음들이 내뱉지 못해져 왔다.


'누군가를 불편하다면, 그것은 이미 농담이 아니'라고, '그 발언은 혹은 그 행동은 불쾌하다'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변화가 필요하고 변화를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나는 용기가 없었고 소심했다. 하지만 매 순간 용기를 내어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고 지치기도 했다. 또 어떤 상황에서는 분명 잘못된 것은 알겠는데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국 나는 침묵했다. 불편함과 불쾌한 마음이 존재하지만, 언어가 없어 표현할 수 없었던 경험.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걸 꿰뚫어 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p.182,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


소설 속에서 이 글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불편한 마음, 조심스러움.... 이 마음들이 아직 언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내뱉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여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양한 언어들이 생겨났고 그만큼 발언의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표현되지 못한 수많은 마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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