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무슨. 걱정하지 마세요. 암이면 살부터 빠질걸요?
지난주에 이러이러해서 대학병원에서 세침검사를 하고 왔다고 말했더니 직장동료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대답했다. 실제로 암 관련해서 유튜브를 찾아보면 대표적인 증상에 [급격한 체중감소]가 꼭 있었고, 그에 달린 댓글 중 '걱정돼서 들어왔다가 체중감소에서 안심하고 갑니다'에 좋아요 숫자가 압도적이었는데 그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많은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이보다 더 완벽하게 나를 안심시키는 말은 없었던 것이다. 역시 다른 사람들도 살이 쉽게 빠지지 않는 거였어. 암이 아닐 거라는 안심과 다이어트 동지에 대한 공감도 같이 얻었다.
- 역시 그렇겠죠?
- 그럼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세침흡인검사를 하고 검사결과를 듣기까지는 2주의 시간이 걸렸다. 원래 일주일이면 들을 수 있었지만 이비인후과 담당 교수님이 그다음주가 휴가기간이라고 해서 다다음주에 와야 한다고 했다. 아무렴 어때. 상관없었다. 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온갖 나쁜 상상을 했는데, 막상 검사를 받고 나니까 별 일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일이 바쁘기도 했고 연말이라 일상에 소소한 이벤트들이 많았다. 검사 결과를 듣는 일 또한 올해가 가기 전에 하나의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달력에 일정을 추가했다.
얼마나 우리가 별 일 아닐 거라 생각했냐면 검사 결과를 듣고 나서 제주도로 떠나는 태교여행을 잡았다. 일부러 그러려던 것은 아닌데 마침 나의 휴가기간이 12월 마지막 주 일주일이었고 대학병원 검사결과를 듣는 날도 마침 일주일의 딱 중간인 수요일이었다. 20주 차, 태교여행을 가려면 일정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이때가 딱이었다. 검사결과 듣고 후련한 마음으로 출발해서 토요일에 돌아오지 뭐. 해피엔딩의 결말을 알고 있는 독자처럼 나는 빠르게 책장을 넘겨 제주도에서의 행복한 3박 4일에 어서 빨리 도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태교여행을 가는 날이자 검사결과를 듣는 날.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떠나는 길은 어디가 되었든 신나는 일이라는 것을 대학병원에 주차하면서 깨달았다. 차들로 꽉 찬 대학병원 주차장에서 이렇게 설레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좋은 소식이라도 들으러 가는 사람처럼.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제주도 갈 생각에 신났는지 심지어 병원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 전 날 내린 눈으로 꽝꽝 얼었던 얼음 바닥을 딛고 하늘을 보고 자빠졌다. '아니 조심해야지!' 남편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두 손을 잡고 일으켜주면서도 너무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발랑 하고 넘어진 게 웃겨서 우리는 암센터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 비행기 시간 괜찮겠지?
- 이제 이다음이 우리 차례니까 괜찮을 것 같아. 그보다 여보, 이제 마음 단단히 먹고.
내 두 손을 잡고 기도해 주는 남편을 따라 기도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엔 별일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얼른 괜찮다는 말 듣고 제주도로 날아가야지. 얼마나 후련할까.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머릿속엔 이런 생각들로 가득했다.
- 김 OO 님 이제 들어갈게요!
내 차례가 되어 진료방 안으로 들어갔다. 2주 만에 보는 교수님 얼굴이었다. 교수님과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고 자리에 앉았다. 그 인사 뒤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묘한 공기에 나의 들뜬 마음은 솜에 물을 부은 것 마냥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 임신 지금 몇 주차되셨죠?
- 이제 20주 차요!
- 그렇구나. 그래요.
그리고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진료 대기시간도 지연되었고 밖에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도 많은데, 이 바쁜 병원에서 지금 이 공간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교수님이 왜 뜸을 들이시는지 나도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 그 사이 목에 있는 멍울이 다른데 생기진 않았나요?
- 네... 딱히. 그런 건 없었어요.
- 저번에 검사를 하신 건 참 잘하신 것 같아요. 그 목에 있는 멍울을 조직검사 해보니까 양성종양은 아니고요. 림프종이라고 결과가 나왔어요. 그래서 저희가 혈액종양내과 잡아드릴 테니까 그쪽에서 자세히 진료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림프종?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되묻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림프종이 정확히 어떤 질병인지는 몰랐지만 내가 상상한 결과는 아닌 것임이 분명했다.
-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 혈액종양내과 가장 가까운 일자로 진료 잡아드리고, 산부인과도 협진요청해서 같이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산부인과는 고위험산모 쪽에 경험 많으신 교수님으로 잡아볼게요.
자꾸 눈물이 차올라서 교수님을 보고 있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교수님은 내가 너무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는지 그다음부턴 뒤에 서있는 남편을 향해 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어영부영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진료방을 나오는데도 어안이 벙벙했다.
- 저희 다음 진료는 가장 빠른 일자가... 이틀 뒤에 혈액종양내과 오전 11시 진료인데 괜찮으세요?
이틀 뒤면 아직 제주도에 있을 터였다. 나는 그 와중에도 여행일정이 생각나서 하루만 더 미룰 수 없냐고 물었다. 제주도 3박 4일 중에 가장 가고 싶었던 호텔을 마지막 날로 예약해 뒀는데 그 비싼 곳을 가보지도 못하고 날리는 게 아까웠다.
- 교수님께 여쭤봤는데 그렇게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하셔서요. 하루라도 빨리 오셔서 진료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임산부라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래도 검사하시겠냐고 물어보셨던 분인데 이제는 하루라도 빨리 와서 진료를 봐야 한다니. 모르긴 몰라도 이 상황이 심각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눈물범벅으로 하루만 늦게 와도 되냐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나를 잘 달래서 일단 로비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여보, 괜찮아. 다 괜찮아. 일단 진정하자. 너무 놀라면 안 돼.' 남편은 차분히 나를 달랬고 나는 눈물을 좀 추스르고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자리에 일어났다. 침착한 남편을 보니 뭐가 되었든 일단은 괜찮은 것 같았다. 나중에 남편이 얘기해 줘서 안 사실이지만 남편은 내가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울먹이며 부모님께 전화했었다고 했다. 남편도 얼마나 놀랐을까. 그런데도 티 내지 않고 남편은 내가 돌아오자 진료비 결제하고 조심히 차타러 가보자고 말하고 손을 꼭 잡았다.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가장 처음 한 일은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통화신호가 가자마자 바로 받았다. 담담하게 손을 잡아주었던 남편 덕분에 눈물이 그쳤었는데 전화를 걸어 '엄마'하고 부르자마자 참을 새도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병원 로비 한복판에서 흐느껴 울었다.
- 암 이래?
전화를 걸자마자 흐느껴 우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엄마는 믿기 어렵다는 듯이 물었다.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는 '우리 집안에 암 관련 된 내력은 없어. 아빠 쪽도 그렇고 엄마 쪽도. 그러니까 암은 절대 아닐 거야.' 확신에 차서 말했었다. 가족력도 없는데 서른 중반인 딸이 갑자기 느닷없이 암이라니. 그것도 임신 중에. 엄마도 더는 할 말이 없어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하고 다섯 살짜리 딸 달래듯이 나를 달랬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비행기 시간이 임박해서 이러나저러나 공항에는 가야 했다. '이 와중에 무슨 태교여행이야.' 하기에는 오히려 태교여행이라도 잡혀 어디라도 떠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병원에 올 때 와는 달리 나갈 때의 차 안은 조용했다. 남편도 나도 아무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게 여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
병원을 빠져나와 한강을 건널 때 즈음 남편이 말했다.
- 그저 우리에게 갑자기 일어난 일이니까... 다 뜻이 있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세 가족을 이루는 과정 중에 이런 일이 생겼지만 헤쳐나갈 길이 분명히 있을 거야. 미리 걱정하고 근심하지 말자. 태교여행 재밌게 다녀오자.
남편의 담대한 목소리가 마음에 꽉 차게 울렸다. 빠르지도 않은 차에서 나는 괜히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다가올지 모르지만 이렇게 남편과 함께 안전벨트를 단단히 붙들어 멘 상태라면 잘 지나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