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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북 Oct 01. 2024

엄마가 되면 엄마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엄마 인생에 가장 소란했던 시절의 목격자.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나의 어릴 적 기억은 엄마의 최악의 시기와 맞닿아 있다. 나는 부서진 방문을 가리기 위해 붙인 구구단 포스터를 보며 구구단을 외웠고, 고함과 비명을 잊기 위해 침대 머리맡에 놓인 키보드를 눌렀으며, 엄마 아빠의 보호와 관심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야 할 나이에 엄마를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을 느꼈고, 엄마 아빠에게 딱 붙어 떨어지기 싫어할 시기에 엄마를 향해 빨리 가라고 손짓하고 먼저 돌아서는 강단을 배웠다.


아빠는 떠올리면 눈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웠고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또 그만큼 엄마를 많이 좋아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어느 날 엄마와 엄마와 관련된 물건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가족 누구도 나에게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인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슬펐지만 혼날까 봐 울 수는 없었다. 마치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더는 엄마가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도 나에게 인사 없이 간 것은 조금 서운했다. 서운하다는 단어를 모르는 나이에도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엄마는 그 이후로 딱 한 번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에 찾아왔는데, 나는 아침에 신발을 갈아 신는 아이들 틈 사이에서 엄마를 발견하자 창피한지도 모르고 달려가 엄마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그러니 실은 나도 얼마나 어렸던 나이였는지) 나는 눈물 콧물을 하도 많이 흘려서 엄마 옷에 코를 풀었던 기억도, 1교시 종이 울리자 엄마가 울면서 어서 교실로 올라가 보라고 했던 기억도, 그리고 오늘 엄마가 찾아온 건 절대 할머니나 아빠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래서 내 기억으론 절대 할머니나 아빠에게 엄마가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엄마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시간이 흘러 어른들 사이에 어떠한 협의가 되었는지 나는 공식적으로 2주에 한 번씩은 엄마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토요일이면 엄마를 만나러 가서 엄마의 작고 작은 집에서 하루 자고 일요일이 되면 아침 방영하는 디즈니 만화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그때 그 만화 영화가 끝나는 게 얼마나 싫던지. 엄마랑 헤어지면 나는 혼자 5층 계단을 씩씩하게 올라가야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남은 오후 일과를 보내기엔 마음이 너무 슬펐다. 그렇다고 슬픈 마음 그대로 표현해 버리면 아빠에게도 혼나고 할머니에게도 혼났기 때문에 나는 밥을 먹다가도, 숙제를 하다가도 갑자기 세수가 하고 싶다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찬물에 세차게 얼굴을 비비며 울었다.






2주에 한 번 오던 토요일은 어떤 때에는 4주에 한 번 오더니 시간이 지나자 그마저도 오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엄마를 만나는 토요일은 사라졌지만 나는 비공식적으로 할머니와 아빠에게 친구를 만난다고 하고 몰래 엄마를 만나러 갔다. 엄마네 학교 앞 공중전화 부근에 서 있으면 엄마의 빨간 차가 정문에서 나오고, 엄마가 나를 발견하면 정문으로 내려가다 말고 비상깜빡이를 켜고 차를 세웠다. 그럼 나는 신이 나서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와 보내는 소중한 주말의 몇 시간이었다. 나는 매번 친구 대신 엄마를 선택했고, 일기장엔 친구를 만난 것처럼 썼지만 나의 마음속 비밀 일기장엔 엄마와의 추억을 꼬박꼬박 새겼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무렵 엄마의 인생은 공개 일기와 비밀 일기로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엄마에겐 새로운 결혼사진이 생겼고,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생겼으며, 새롭게 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 엄마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세 식구와의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그려갔다. 물론 비밀 일기장인 나를 잊진 않았지만.


엄마는 내가 엄마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5살에도, 눈치 보느라 울지 못했던 7살에도, 사춘기로 엇나갔던 14살에도, 모든 게 버거웠던 17살에도, 20살에도, 26살에도 계속 나에게 대고 일기를 썼다. 아빠가 엄마에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썼고, 할머니가 엄마에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썼고,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썼고, 그래서 엄마가 어떻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썼다. 그래서 나는 자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도 엄마 덕분에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떤 것은 알기 싫을 때도 있었다. 듣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았다. 나는 아빠로부터 상처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를 찾아갔는데 그러면 엄마는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면서도, 꼭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엄마에게 예전에 어떻게 했었는지를 곁들여 나로 하여금 아빠라는 사람을 더욱 증오하게 만들었다. 엄마를 만나는 날이면 나는 내가 가져온 아빠에 대한 상처 위에 엄마가 그동안 받았던 상처를 얹어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 그런 마음으로 집에 가면 더더욱 아빠에게 화가 나고 원망이 일어서 도저히 함께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어졌다. 그런데 막상 엄마는 내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다시 화목한 세 식구가 되었다. 엄마의 공개 일기는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여서 어쩐지 나는 허무하고 외로웠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엄마를 친구라고 여기기 시작한 시점이. 나는 엄마마저 분노나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게 두려워 스스로 엄마에게 느끼는 어려운 마음들을 외면했다. 난 엄마의 상처를 다 아니까,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아니까, 나는 엄마의 비밀일기장이니까. 엄마를 이해해야 했고, 공감해야 했고, 응원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부정적인 마음은 엄마라는 주어 위에 친구로 바꿔 써서 없애버렸다. 마치 어릴 적에 엄마를 만나놓고 일기장엔 친구를 만났다고 쓰는 것처럼,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마랑 대화하다 보면 엄마는 아무 생각 없이 툭 꺼내는 말들이 있다. 딸이 생리통으로 너무 아파해서 걱정이라는 이런 말. 그럼 나의 진짜 마음은 '엄마, 나는 생리를 시작할 때 엄마가 없어서 얼마나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힘든 일들이 많았는지 알아?' 하고 울컥 화를 내고 싶은데 그건 엄마를 원망하는 말이니까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엄마를 미워할 수 없으니까. 엄마를 다 이해하는 비밀 일기장이니까. 그래서 대답하기 전에 슬며시 주어를 엄마에서 친구로 바꿔 생각했다. 만약 친구가 딸이 생리통으로 힘들어하면 걱정되겠다고 자연스럽게 공감해 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화를 내는 대신에 '어떡해요. 많이 아프겠네요. 얼른 가보셔야겠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런 대화가 그간 이거 하나뿐이었을까. 나는 불쑥불쑥 올라오는 감정들이 곤란해서 매번 그때마다 엄마를 친구로 바꿔 생각했고, 그렇게 삼십 년이 넘다 보니 이 마음도 습관이 되어버렸다. 엄마에겐 제대로 화를 낼 줄 몰랐고, 서운해할 줄 몰랐고, 원망할 줄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나와 엄마, 남편과 아기 네 사람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남편도 장모님과 처음 살아보는 것이었지만 사실 나도 엄마와 이렇게 나의 공간에서 살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위로서 장모님에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 이상으로 나도 엄마에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결국 내가 엄마에게 딸로서 제대로 화내지 못해서 이지경이 된 것 같았다.


엄마가 나와 남편의 허락 없이 친구를 데려왔을 때 '엄마, 뭐 하는 거야. 지금 나다 어제 퇴원했는데 무슨 집에 외부인을 데려와. 그리고 최소한 내 허락은 받아야지!' 하고 솔직하게 화내지 못했고, 당황해하는 남편 앞에서 엄마와 엄마 친구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엄마가 침대에서 아기랑 함께 잘 때에도 '아니 아기는 아기 침대에서 재우라니까!' 한마디면 될 걸, 엄마의 마음이 상할까 봐 '저희가 책에서 봤는데 요즘은 같은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소아과 의사들도 다 그렇다고 한다고...' 하고 말이 자꾸만 길어졌다.


엄마가 가족들을 초대했을 때에도 '지금 너무 덥고 아기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니까 가족들 다 이따가 봐, 이따가.' 하면 모든 상황이 정리될 걸,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오히려 남편 뒤에 숨기도 했다.







나는 정말이지 내가 너무 바보 같아 참을 수 없었다. 엄마 도움 더는 필요 없다고, 엄마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 지르고 난 후에 마치 막아뒀던 댐이 무너진 것처럼 내 마음에는 지난 몇 십 년간 못했던 분노와 원망의 말들이 머릿속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이 분노의 마음을 누를 방법도 없었다.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의 최선의 노력을 한 건 알지만 더 이상 엄마의 마음이나 노력 같은 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이렇게 되어버린걸. 나는 밤이면 엄마에게 못다 한 원망의 말들이 떠올라 화가 났고, 아침이면 엄마에게 카톡으로 쏟아놓고 또 엄마가 너무 상처받을까 혼자 메시지를 곱씹으며 괴로워했다.









티비 프로그램에서였나. 누군가 출산을 하고 나니 엄마와 저절로 화해가 되었다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 말을 오래 마음속에 품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출산을 하고 엄마가 되면, 엄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 순간을 기다려왔는데 지금의 나는 오히려 엄마를 더는 이해하지 않겠다는 결심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허탈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후에 엄마와 다시 대화도 하고, 사과도 받고,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도 가졌지만 마음속에 한번 허물어진 댐은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2차 항암, 3차 항암을 거치면서 엄마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수 없는 건강 악화로 손을 내밀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속으로 엄마와 진짜로는 화해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쉽게 내 마음을 속이지 않으리. 이 때문에 관계가 영영 회복되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다는 심보였다.




하지만 그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엄마에게서 외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은 날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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