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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빈 Mar 26. 2020

서울의 참조도시 (1) - 간선급행버스

쿠리치바 - 2019.0802.1100

 채 일주일도 안 되는 빡빡한 일정에도 굳이 쿠리치바를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전히 내 의지였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이역만리 브라질 땅에서 상파울루에만 머물다 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업무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딱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보지는 크게 세 곳, 모두 상파울루에서 비행기로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들로 대략 예상되는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1 Rio de Janeiro: 브라질 최대의 관광도시 리우의 거대 예수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2 Foz do Iguazu: 세계 3대 폭포라 불리는 이과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3 Curitiba: 전 세계 건축/도시/교통/행정가들의 참조 도시, 쿠리치바를 답사한다.


 관광을 목적으로 왔다면 무조건 1번 아니면 2번이 정답이다. 하지만 난 여기에 우리 회사와 전 직원을 대표하여 와 있고,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터였다. 이미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출장 셋째 날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다 다음날 아침 쿠리치바로 출발하는 항공권을 구입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버를 타고 상파울루 콩고냐스 공항으로 향했다.


상파울루 과를류스가 인천 국제공항이라면, 콩고냐스는 김포공항에 해당한다.


무려 1919년에 개항한 공항으로 건축양식 또한 당대의 모더니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나를 쿠리치바로 데려다 줄 골 항공 소속 비행기, 브라질 국내선 시장은 라탐(LATAM)과 골(GOL) 양분 체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쿠리치바라는 도시 이름이 다소 생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인터넷에서 쿠리치바를 검색해보면 '한국 정치인·공무원이 가장 많이 찾는 브라질 도시' 같은 제목의 기사가 수두룩하다.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역대 서울시장 또한 모두 이곳을 다녀갔다. 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장과 도시정책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6, 7급 공무원들까지 연수로 이 도시를 찾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대체 왜 이 먼 곳까지, 그것도 한국에서 직항 편조차 없는 쿠리치바까지 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영문 웹에서 조금 더 찾아보니 쿠리치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의 대부분의 현대 도시들은 쿠리치바를 벤치마킹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명실상부한 '전 세계의 참조 도시'인 셈이다.

상파울루에서 쿠리치바까지의 비행경로, 기내 좌석에 AVOD 모니터가 없는 대신 와이파이를 이용한 개별 스마트폰 연동 서비스를 제공한다.


브라질의 제6대 대통령 이름을 딴 쿠리치바 아폰수 페나 국제공항


출국장 문을 나서자마자 그 유명한 튜브 형태의 버스 정류장부터 눈에 들어온다.


 쿠리치바는 상파울루 콩고냐스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파라나 주의 주도이며 2019년 기준 인구는 193만 명으로 우리나라 대구광역시(245만, 2020년 기준)와 대전광역시(152만, 2020년 기준)의 딱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쿠리치바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 시장이자 전 주지사, 도시계획가이자 행정가인 제이미 레르네르(Jaime Lerner, 1937-)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71년에 제70대 쿠리치바 시장이 된 그는 이후 제73대, 제76대 재임 이후 파라나 주지사까지 역임했다. 묘하게 시간 간격을 두고 공직을 이어나간 덕분에 사실상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30년간 쿠리치바의 모든 것에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저서는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있고 TED 강연 등도 제법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길. 그럼 그가 시장이 된 이후 지난 30년간 어떤 일들을 해왔기에 쿠리치바가 전 세계의 참조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진실은 늘 현장에 있다. 그리고 난 궁금하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쿠리치바 시내를 가로지르는 중앙버스차로와 급행버스. 잠깐만,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 매일 아침 출근길 서울에서 보던 풍경이었구만! (사진 출처: 연합뉴스)


 쿠리치바가 국가, 학문, 산업을 막론하고 전 분야에서 다양하게 관심을 받아왔음은 자명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도시에 대한 교통공학 엔지니어들의 사랑만큼은 좀 각별하다. 간선급행버스체계(BRT: Bus Rapid Transit)란 간단히 말해서 '지상에서 버스를 지하철처럼 달리게 하자'는 취지의 대중교통 정책이다. '지하철처럼'이라는 말은 곧 버스 운행에 '정시성'과 '신속성'이 보장된다는 뜻이며 이를 위해선 중앙버스전용차로의 설치, 승하차시 시간 지연이 없는 정류장 모델, 노선 간 통합 운영체계 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쯤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그렇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적용된 중앙버스차로와 간선급행버스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쿠리치바의 BRT를 벤치마킹한 것이며 이명박 전 시장 시절에 완성되어 지금까지도 나름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정책이다. 그러고 보니 서두에서 이명박 전 시장도 쿠리치바를 다녀간 적이 있다고 했다. 이제야 퍼즐 조각이 짠 하고 맞춰지는 기분이다.


쿠리치바에선 이런 굴절버스도 제법 다니는데, 이 한대로 무려 400명까지 수송이 가능하다고 한다.


1974년에 촬영된 쿠리치바, 중앙버스전용차로를 확인할 수 있다.(사진 출처: https://omensageiro77.wordpress.com)


 사실 서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BRT 체계를 도입한 도시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 모든 도시들은 100% 쿠리치바를 벤치마킹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쿠리치바는 이런 것들을 무려 1970년대에 완성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시가 버스 정책을 개편한 것이 2004년이다. 서울에서 나고자란 내 입장에서야 새삼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시스템이지만 우리나라 70년대에  BRT가 도입되었다고 상상해보면 얼마나 급진적이고도 과감한 정책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오스카 니마이어 뮤지엄 앞의 버스 정류장, 쿠리치바시의 표준인 '튜브(tube)' 형태로 되어 있다.


입구에서 들여다본 내부의 모습. 승하차 동선이 튜브 양 옆으로 각각 분리되어있다.


버스가 들어와 정차하는 쪽으로는 발판이 나와 있어 편안한 승하차를 돕는다.


정류장 안에서 편안하게 기대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쿠리치바의 버스 시스템의 성공을 도운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튜브(tube) 정류장'과 '중앙버스차로'다. 독특한 외관의 이 버스 정류장은 레르네르 시장이 직접 디자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정류장 형태는 버스 승하차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어 정시성 확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승객들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 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1 지하철 개찰구 형태의 문에서 요금 지불을 하고 정류장 내부로 들어간다.
2 비바람과 햇빛을 피하며 편안하게 버스를 기다린다.
3 버스가 도착하면 자동으로 나오는 발판을 통해 빠르고 안전하게 승차한다.


 간단한 원리지만 버스 승하차시 시간 지체를 불러일으킬만한 아래의 몇 가지 요인을 완벽하게 차단한다.


1 요금을 미리 지불하기 때문에 승차 시 진입이 빠르다.
2 승강장과 버스 높이가 동일하여 교통약자 진출입이 빠르다.
3 버스 정차 위치가 정해져 있어 승객과 버스가 서로를 찾아 헤매는 일이 없다.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 출구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짜잔! 거의 완벽한 도킹을 보여주는 쿠리치바의 버스와 정류장. 살펴본 바로는 버스 기종에 따라 사진보다 더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2020년 현재 서울의 버스체계와 비교해보자. 1번의 요금 지불방식은 우리나라도 이미 RFID 기반 교통카드 체계가 도입되어 동일한 효과가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서울이 더 진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2번과 3번이다. 이제는 서울도 상당수의 차량이 저상버스로 교체되었으나 그럼에도 승강장과 버스 바닥 사이에는 높이 차이가 존재한다. 참고로 쿠리치바의 튜브형 정류장의 진출입구에는 슬로프 또는 휠체어용 리프트가 개별적으로 설치되어있어 누구든 자유롭게 승강장 레벨로 올라갈 수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3번인데 아직까지도 서울에서는 정류장에서 내가 타려는 버스를 찾아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물론 인구 규모만으로 5배 이상 차이나는 두 도시이기에 완벽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쿠리치바 도로체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단면도 (출처: UN-Habitat, 2013)


 중앙버스차로를 포함하는 다층형 도로체계 또한 쿠리치바의 인기 있는 벤치마킹 대상이자 BRT 시스템을 성공시킨 핵심 요소이다. 도시의 주요 거점들을 연결하는 이 도로 시스템은 아래와 같이 총 네 단계(위 단면도에선 세 단계까지만 표시되어있다)의 층위를 가지도록 설계되어있다.


1단계 중앙차로: BRT 시스템을 위한 버스전용차로
2단계 보조도로: 중앙차로 바로 옆에 붙어 일반차량 통행 처리
3단계 간선도로: 한 블록 뒤, 4차로 일방통행으로 설계되어 일반차량의 주요 통행량을 처리
4단계 이면도로: 간선도로 이후 안쪽 블록에서 도시조직 내부 세밀한 통행을 처리


곧게 뻗은 왕복 2차로의 버스전용차로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일반차량용 보조 도로가 있고...


... 한 블록 뒤로는 일반차량의 대규모 교통량을 처리하는 4차선 일방통행의 간선도로가 있으며...


... 다시 한 블록 뒤로는 작은 블록을 이루며 왕복 2차로의 이면도로가 이어진다.


 물론 쿠리치바도 완벽히 새롭게 계획된 도시가 아니다 보니 4단계 시스템은 주요 도심 핵들을 연결하는 식으로 부분 적용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도로 폭을 도입하기 위해선 기존 도시조직의 철거와 정비가 불가피했을게 분명하다. 주민들을 향한 끊임없는 설득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미 반세기 전에 이러한 급진적인 버스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쿠리치바는 충분히 배울 점이 많은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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