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한테 한 번도 안 긁혀봤구먼
나로서는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때가 간혹 있다. 차분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다. 내 기준에서 나는 성격이 정말 급하고 매우 즉흥적이며 지나치게 감정 기복이 심해서 앞서 행동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내게 그런 소리를 할까?
최근에도 누군가 내게 '너무 차분해 보여서 일하기 힘들 것 같다' 고 했다. 참 신기했다. 외모가 차분해 보이는 건가, 말투가 차분해 보이는 건가. 회사에서는 지랄이 필요할 때마다 찾는 사람이 나인데(속상하다...), 어쩌다 그렇게 차분한 이미지를 풍기게 됐을까. 뭐, 무튼 말투나 외적인 부분이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 치자.
'차분해서 일하기 힘들 것 같다'는 함께 일하면 답답할 것 같다는 것일까, 또는 일 자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할 것 같다는 뜻일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을 상상한 것인지 묻고 싶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생각해볼 문제였다. 차분한 성향을 가진 사람(='차분이'라고 하겠다)은 과연 일하는 게 정말 힘들까?
주변의 차분이 동료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필요한 테스크를 정리한다. 일의 진척에 다소 충돌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진정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생각을 정리한 뒤 대처한다. 그렇기에 성급한 판단을 하거나 이유 없는 소리침이 적은 편이다. 물론, 이런 차분함을 악용해 무시를 하거나 더 센 척을 하는 모지리들이 있다. 내 주변의 차분이들은 그런 모지리들마저 차분하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누구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고 문제를 소신껏 해결해낸다.
위 사례를 써놓고 나의 회사생활을 돌이켜보면, 확실히 차분이는 아니다. 일을 정리하는 순간은 차분이에 가깝지만 충돌이 생겼을 때는 그 자리에서 즉시 의견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강하게 발언하는 것은 다반사,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앞서 얘기한 모지리들에게는 더 모지리처럼 한다. 센 척을 하면 그보다 더 강하게 나가고, 무시를 당하면 똑같이 무시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간다. (=쌈닭으로 표현할까 했지만 '도전형 인간' 정도로 표현해보겠다.)
사례가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전자든 후자든 방법을 달리하는 것뿐,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성향은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글로만 보면 후자의 상황이 주도적으로 결과를 이끌고 나이스 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막상 현업에서는 많은 사람들은 전자로 일하는 사람을 더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다. 면접을 봐도 '도전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채용하려은 의지를 보이지만, 막상 '일을 잘한다' 소리를 듣는 사람은 차분이들이 많다.
무튼, 앞선 두 가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을 잘하는 것은 성향과 무관하다. 성향이 도전적이지 않거나 차분하다고 해서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견이다.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고, 결국 '말에 힘이 있는 사람'이 상황을 이끌어 가는 것이지 성향과는 무관하다.
다만, 속도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차분이들은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기 때문에 빠른 피드백을 원하는 애자일방식을 선호하는 팀에서는 다소 답답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속도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시켜주기만 한다면 차분이들도 충분히 속도를 낼 수 있다. 여기에서 성향이 조금 갈리는 것인데 도전형 인간은 대체로 성급하기 때문에 피드백을 빨리 주고받으려는 거고 차분이들은 생각의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뿐이다. 일의 결과와는 이 또한 무관하다. 그리고 막말로 빨라봐야 얼마나 빠르겠는가.
도전에 대한 키워드도 생각해보자. 도전형 인간들은 생각이 났을 때 그것을 실행으로 옮겨보려 제안부터 하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차분이들은 대체로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 않아 일에 열의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시시때때로 의견을 발언하지 않는 것뿐, 자신들의 생각을 다른 곳에 차곡차곡 정리해둔다. 그리고 적재적소에 의견들을 꺼내와 차분하고 정돈된 말투로 발의를 한다.
도전적이라는 것은 꼭 앞에 나서서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는 차분이들도 자신의 생각안에서는 누구보다 도전적이고 이상적인 사람일 수 있다. 다만 입 밖으로 바로바로 꺼내지 않는 것뿐이다. 필요한 순간이 되면 누구보다 정면에 맞선다. 도전이란, 맞서는 것이 아니던가? 언제부터 매번 앞에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게 도전으로 인지된 건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회사에서 매번 앞에 나서서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을 도전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냥 말이 많은 것뿐.
일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선 글들에도 말했지만 '누구와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는가'이다. 내게 차분해서 일하기 힘들 것 같다고 표현한 그 누군가는 나와 손발이 맞지 않을 것 같다로 예측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객관적 사고로 놓고 봤을 때 '차분한 성향'과 '일을 못한다'는 매칭 오류가 있는 단어다. 회사의 차분이들은 도전형 인간들이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해내고 있고, 제 역할 안에서 그 누구보다 도전적으로 일하고 있다.
내게 말을 건넨 사람은 내가 얌전한 고양이처럼 옆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는 차분이로 보였겠지만, 여유로움 속에 숨겨진 발톱이 얼마나 강력하고 가차 없는지 앞으로 많은 차분이들을 만나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날카로운 발톱에 긁혀보면 정신이 훅 들 테지. 사람의 성향으로 일이나 도전성을 판단하지 말자. 성향은 성향일 뿐, 회사원은 그저 일을 '되게 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방법이야 어떻든 필요한 문제 해결 방법을 어떻게든 취득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정리하면, 차분한 성향은 함께 일하기 힘들지 않다.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도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