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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Nov 07. 2022

두렵다가 아쉬워진 이야기

두 편의 시와 다소 긴 프롤로그

20대 때 나는 막연히 서른을 두려워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지극히 단조롭고 시시한 시절이었기에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잔치에 아쉬움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희덕 시인의 시 구절처럼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 가고’ ‘그 주검으로도 어린것들의 살이 오르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는 생활력 만랩의 경지가 왠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나 서른이 되면-나희덕>


지금 생각해보면 내 두려움은 ‘굳어진다’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 20대 시절 내가 딛고 걸었던 땅은 습지처럼 물컹했다. 습지의 토양이 생태계의 보고로 출렁대듯 그 시절 나의 단조로운 일상 저 아래에는 ‘어쩌면’이라는 상상이 늘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사소한 계기로 인생의 대단한 터닝포인트를 맞게 될지도 몰라... 어쩌면 평생 화려한 솔로로 살 수도 있지... 어쩌면 내일이라도 직장을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벌일 수도 있어...


마침내 서른이 된 내 생일날. 나는 떡진 머리에 수유복 지퍼를 활짝 열고 생후 2개월 된 첫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어쩌면 오늘은 한 시간쯤 낮잠을 잘지도 몰라, 어쩌면 그 사이에 상쾌하게 머리를 감을 수 있을지 모르지... 그런 희망을 품으며.     


아기가 내 품에 안겨 젖을 빠는 동안 습지처럼 물컹했던 내 ‘어쩌면’ 가능성은 조금씩 물기를 잃어갔는지 모른다. 하긴 젖먹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시기에는 그런 자각을 할 겨를이 없다. 아기도 나도 먹고 자고 쉬는 것에만 혼신의 힘을 다했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젖 빨던 첫째가 초등학교를 제법 매너리즘 속에 다닐 무렵에 둘째도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놀랍게도 나의 삼십 대는 모두 지나가버렸다. 아니, 삼십 대가 지나갔다기보다는 사십 대가 내 앞에 훅하고 나타났다... 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때의 내 기분을 표현해보자면 이렇다.


나는 아등바등 애들을 키우고 또 헐레벌떡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면 또다시 애들이 우다다다 품 안으로 달려오는, 마치 덜컹이는 기차 안에서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복합된 고도의 정신없는 업무를 보느라 기차가 달리는지 마는지 창밖을 살펴볼 새도 없었는데, 갑자기 기차 플랫폼에 내가 서 있고 타고 있던 그 기차가 내 앞을 슝하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유체이탈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마흔이 되자,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정말로 기차 플랫폼에 서 있기라도 한 듯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찬바람이, 이유 없이, 의미 없이, 그야말로 앞뒤 아무 인과관계도 없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나는 뭐랄까... 내가 아쉬웠다.


나는 여러 단어와 어구를 떠올리다가 ‘아쉽다’는 말로 그때의 감정을 겨우 정리해 본다. 아쉽다... 이 정도면 충분한 표현인가?


<네이버 국어사전>








‘아쉬움’은 불만족, 미련, 서운함 같은 감정을 달고 다닌다. 그런데, 불만족, 미련, 서운함의 감정을 확인하고 나니 또 한 가지 감정이 똥개처럼 따라붙는 것을 느낀다. 

 

억울함.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 따위 기분이 드는 것이냐! 그래, 나는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내 삼십 대의 어디에 그런 미련한 감정을 남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2011년부터 2020년까지 연도별로 나의 업적(?)을 정리해보기도 했다. 자녀 출산, 직장에서의 승진, 연차가 쌓이면 누구라도 받는 표창 등은 물론 성취라고 부르기도 뭣한 자잘한 사건들까지 치사하게 다 적었다.         


그렇게 삼십 대를 돌이켜보니 대체적으로 열심히 살았다는 싱거운 결론이 나왔다.

비록 조금 닳고 신선함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아쉬워서 가슴이 뚫릴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20대의 노심초사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제법 유들해진 시간이었다. 어쩌면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 가야 한다는 처절함은 이 유들함의 시적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모든 이성적 판단과 분석에도 불구하고 마흔 살의 나는 여전히 기차 플랫폼을 벗어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문제적 상황이고 나는 답을 찾아야 했다.  

   

일단 닥치는 대로 책을 찾아보았다. 마흔의 심리학, 마흔의 인문학, 마흔의 철학, 마흔의 인간관계, 마흔의 자기 계발... 공자는 자신의 마흔 살을 ‘불혹’으로 쌈박하게 정리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정의일 뿐, 마흔은 수없이 ‘혹’하는 나이가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출판업계에서 ‘마흔’을 주제로 이토록 다양한 책을 버무려냈을 리가.        


우스운 것은 출판업계의 유혹이 아무리 요란하다 한들, 사실 스마트 폰의 유혹만은 못하다는 점이다. 도서관과 서점에서 구한 책들을 쌓아두고  밤늦도록 휴대폰만 쳐다보던 어느 날, 문득 또 한 편의 시가 나를 찾아왔다. 지금 기억으로는 ‘마흔에 염전 바닷가에서 어쩌고 하는 시가 뭐였죠?’라는 질문에 대한 답글이었다.(왜 그런 것을 보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마흔에 염전 바닷가에 앉아서 어쩌고 하는 시, 바로 이문재 시인의 <소금창고>이다.



여름 바닷가에 돗자리를 펴고 오래 놀다 보면 불현듯 바다가 저만치 물러나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돗자리는 그 자리 그대로인데 발 앞에서 출렁이던 젊은 파도 대신 깨진 조개껍질과 너절한 해조류, 이름 모를 갯가 생물들의 숨구멍만 뽕뽕 뚫려있는 모래바닥이 가당찮게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기가 차는 것은 눈치도 못 채게 살금살금 물러난 치사한 파도가 저만치서 자꾸만 철썩이며 밀려오는 척을 한다는 점이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오는 것.

파도가 물러나며 다가오듯, 아쉽고 억울한 마음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그런 잡념만이 가득 쌓여가는

마흔은 본래 그런 나이인 것을 그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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