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침대 (The Empty Bed)

온기 없는 밤, 익숙한 허전함에 대하여...

by 시골아재

서울을 출발한 지 다섯 시간이 넘어서야 낯선 도시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핸들을 꺾자,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마치 잘 만든 VR 화면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현실감 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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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오피스텔은 도시의 야경과 바다를 한눈에 품은, 완벽한 전망을 가졌다. 하지만 불을 켜는 순간, 그 완벽한 프레임 안의 텅 빈 공간이 삭막하게 속살을 드러냈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항상 온기가 감돌던 서울의 집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낯선 페인트 냄새와 바닥의 냉기, 그리고 창에 부딪혀 부서지는 바람 소리.


나는 가장 먼저 옷이 든 박스를 열었다. 구겨진 셔츠 몇 벌과 속옷, 양말. 그리고 책이 든 박스를 열었다. 오랫동안 손때 묻은 책 몇 권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중 한 권을 무심코 펼치자, 10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빛 바랜 가족사진이 북마크처럼 끼워져 있었다. 어린 시연이와 우진이, 그리고… 활짝 웃고 있는 선율과 어색한 표정의 젊은 내가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 행복이 낯설어, 잠시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어버렸다.


다른 박스에서는 선율과 함께 쓰던 머그잔이 나왔다.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파리 여행에서 사 온 것이었다. 나는 내 것만 챙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녀의 잔이 함께 딸려와 있었다. 잔에 그려진 에펠탑 그림의 페인트가 희미하게 벗겨져 있었다. 수천 번의 아침을 함께한 흔적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잔을 박스 깊숙이 다시 밀어 넣었다.


가장 큰 박스를 뜯어 두꺼운 이불을 꺼냈다. 침대를 주문했지만, 도착하려면 며칠은 더 걸릴 터였다. 거실 창가, 야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불을 깔았다. 오늘 밤 나의 잠자리였다.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이불 위에 걸터앉았다. 맥주라도 한 캔 사 올 걸 그랬나. 아니, 평소 마시지도 않는 술은 하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창밖의 불빛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무늬를 바라봤다. 자동차 불빛들이 만들어내는 붉은 궤적, 광안대교의 푸른 조명, 멀리 정박한 배들의 희미한 불빛.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흘러가는 불빛의 바다 속에서, 나만 홀로 멈춰 있는 섬처럼 느껴졌다.


자유.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완벽한 고독. 하지만 막상 그 한가운데에 놓이자, 밀려오는 것은 해방감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오는 막막함이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침묵. 서울 집에 있을 때 밤마다 들려오던 냉장고의 낮은 소음이나, 윗집에서 가끔씩 들려오던 의자 끄는 소리, 그리고… 바로 옆에서 들려오던 선율의 고른 숨소리 같은 익숙한 소음들이 사라진 공간. 그 완벽한 고요가 나를 질식 시킬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딱딱한 바닥이 등을 배겼다. 천천히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이 과거의 기억들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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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결혼 첫날밤.


자취 생활이 길었던 나는 혼자 자는 것에 익숙했다. 아니, 혼자 자는 것을 좋아했다. 타인의 존재는 내 수면을 방해하는 가장 큰 소음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선율의 곁에서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완벽한 숙면을 경험했다. 그녀의 체온, 살갗에서 나던 은은한 비누 향기, 규칙적인 숨소리. 그 모든 것이 낯섦을 넘어 기이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는 나의 불면을 잠재우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서른 중반의 어느 일요일 아침. 주말에도 일찍 눈이 떠진 나는 막 잠에서 깬 아이들을 우리 침대로 데려왔다. 아들 우진이는 내 배 위로 올라타 쿵쿵 뛰었고, 딸 시연이는 선율의 팔을 베고 누워 동화책을 읽었다. 좁은 침대 위에서 네 식구가 뒤엉켜 웃고 떠들던 그 아침의 소란스러움. 그 때의 나는, 그 침대가 세상의 전부이자 나의 우주라고 믿었다.


마흔 후반,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등을 돌리고 자기 시작했다. 대화가 사라진 저녁 식사 후,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불을 끄고 눕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같은 공간에 누워있지만, 우리 사이에는 광활한 대륙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뒤척일 때마다 잠에서 깼고, 그녀 역시 나의 작은 기침 소리에도 몸을 뒤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그 침대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불편한 동거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흐으…"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눈을 뜨자 다시 낯선 오피스텔의 천장이 보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잠을 자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한참을 창가에 서서 낯선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봤다.


아직 풀지 않은 박스 더미에서 커피 도구들을 찾아냈다. 원두를 갈고, 필터를 접고,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하지만 서울 집에서 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물맛이 달랐고, 공간의 울림이 달랐다. 똑같은 원두, 똑같은 도구였지만 커피에서는 낯선 맛이 났다. 낯선 도시의 맛, 혹은 외로움의 맛일지도 몰랐다.


나는 커피 잔을 든 채 창가에 서서 밤과 새벽의 경계를 바라봤다. 수평선 너머가 아주 희미하게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왜, 심장은 돌덩이처럼 무겁기만 한 걸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율일까. 확인한 화면에는 아들 우진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아빠, 아침 꼭 챙겨 먹어!]


나는


[알았다. 너도.]


라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고작 다섯 글자를 쓰는 데도 손가락이 무거웠다.


나는 다시 텅 빈 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침대라고 부르기 민망한 나의 잠자리를 내려다봤다.


빈 침대. 그것은 자유도, 형벌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숨소리만이 존재하는 방. 온기 없는 밤과 익숙해져야 할 허전함.


내가 선택한 새 현실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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