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커피 (aka. Maxim Coffee)

향기 없는 아침, 내가 버린 일상들.

by 시골아재

부산에서의 첫 출근 날 아침은 분주했다.


밤새 뒤척인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낯선 환경이 주는 약간의 긴장감이 뇌를 깨웠다. 나는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은 박스들 사이에서 구겨진 셔츠를 꺼내 다림질을 했다. 서울 집에서는 언제나 선율이 아침마다 빳빳하게 다려주던 셔츠였다. 서툰 손길로 다리미를 놀리는 내 모습이 어색했다. 모든 것이 서툴고, 모든 것이 혼자였다.


새 사무실은 해운대의 고층 빌딩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풍경은 그림 같았지만, 내게는 그저 또 하나의 스크린세이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후배가 차린 회사는 젊고 활기찼다.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사무실은 자율주행 로봇처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에너지가 넘쳤다. 후배는 나를 파트너로서 깍듯하게 대우했고, 직원들은 과분할 정도의 존경심을 표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나는 그 순조로움 속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들의 활기찬 대화와 웃음소리는 나와는 다른 주파수에서 흘러나오는 소음 같았다.


점심시간, 그들은 어제 본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나는 끼어들 말을 찾지 못했다. 오후의 티타임, 그들은 새로 나온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들은 열정적이었고, 나는 방관자였다. 그들의 빛나는 눈에서, 나는 더 이상 내게는 없는 무언가를 보았다. 저녁에 회식을 하자는 성화에, 오늘은 선약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들의 세계에 섞여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오후 2시. 점심 식사 후 가장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 나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가 필요했다. 집에서처럼 원두를 갈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타협이 필요했다. 탕비실 수납장에는 온갖 종류의 차와 함께, 노란색 포장지의 인스턴트 커피믹스가 가지런히 줄지어 꽂혀 있었다.


그 노란 막대기를 본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잊고 있던 기억, 혹은 잊고 싶었던 내 모습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나는 무심코 스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바스락거리는 비닐의 감촉, 손쉽게 뜯을 수 있도록 처리된 절취선. 너무나 익숙한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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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큰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였다. 마감에 쫓겨 며칠씩 밤을 새우던 시절, 나는 늘 이 커피를 마셨다. 한 번에 세 봉지씩. 종이컵에 노란 가루 세 개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휘저으면, 달콤하고 자극적인 향이 코를 찔렀다. 그것은 커피가 아니라 카페인과 설탕으로 만들어진 '각성제'였다. 그 독한 단맛으로 위장을 채우고, 뇌를 속이며, 나는 일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성공해야만 했다. 증명해야만 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가진 것 없이 시작한 내가 이 서울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어느 날 새벽, 퀭한 눈으로 주방에서 네 번째 커피를 타고 있을 때였다. 잠에서 깬 선율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당신 그러다 위에 구멍 나. 프로젝트가 당신 몸보다 중요해?"


그녀의 목소리엔 분명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내게 그 걱정마저 나를 통제하려는 잔소리로 들렸다. ‘당신은 모르잖아,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알아서 할게. 신경 꺼."


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선율은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한번 짚어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어깨가 그날따라 유난히 무거웠던 기억이 났다.


나는 남은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왠지 모를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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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말 아침이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 토요일 오전 8시. 나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 시간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핸드 그라인더에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를 넣고 천천히 갈았다. 드르륵, 드르륵. 집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원두의 아로마. 그것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자, 내가 가족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었다.


"음, 커피 냄새 좋다."


잠에서 깬 선율이 부스스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서며 말하곤 했다.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아 내가 커피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는 정성껏 내린 첫 커피를 언제나처럼 그녀의 컵에 따라주었다. 그녀가 아끼던, 파리에서 사 온 에펠탑 그림이 그려진 머그잔에.


"오늘은 산미가 좀 있는 걸로 샀어. 과일 향이 날 거야."


"어디 맛 좀 볼까. 커피 박사님."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리는 말없이, 혹은 소소한 주말 계획을 이야기하며 함께 커피를 마셨다. 인스턴트 커피 세 봉지가 세상과의 전쟁을 위한 갑옷이었다면, 아침의 드립 커피는 유일한 휴전이자 평화였다.


나는 그녀의 '전용 바리스타'였고, 그 역할에 꽤 만족했다.


하지만 그 평화마저, 언젠가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가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커피를 내리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해결되지 않은 코드와 클라이언트의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휴대폰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선율이 평소처럼 주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섰다.


"주말이잖아요. 오늘은 좀 쉬어요. 얼굴이 말이 아니야."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는 상황이야. 당신은 모르잖아."


날카로운 대답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선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내가 따라주려던 자신의 머그잔을 뒤집어 놓고 거실로 나가 버렸다.


그날 아침, 커피의 향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맛은 썼다. 평화의 의식은 깨져버렸다. 갑옷을 입은 내가, 휴식을 취하던 나를 집어삼킨 것이었다.




"선배님, 커피 안 드세요?"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직원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커피믹스 세 개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포장지를 뜯어 종이컵에 가루를 털어 넣었다. 뜨거운 물을 붓자, 역하고 달콤한 향이 확 피어 올랐다.


한 모금 마셨다. 혀를 아리게 하는 단맛, 그리고 그 뒤에 남는 텁텁한 뒷맛. 나는 창가로 걸어가 익숙지 않은 부산의 풍경을 내려다봤다. 깨달음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프게 밀려왔다.


주말 아침의 그 커피가 특별했던 이유는 원두의 종류나 나의 드립 기술 때문이 아니었다. 그 향기를 함께 맡고, 그 맛을 함께 음미하던 '선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커피를 기다리고, 첫 잔을 받아 들고 웃어주던 단 한 사람의 관객. 그녀 없는 커피는, 그저 검고 쓴 액체일 뿐이었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일상은, 사실 내 삶의 모든 '향기'가 피어오르던 유일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는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도, 드립 커피를 내리는 나를 지켜봐 주던 사람도 그녀였다. 두 개의 커피, 두 개의 나.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두 개의 나 중에서, 갑옷을 입은 나를 선택했고, 평화를 주던 나를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갑옷마저 녹슬어 버린 지금, 나는 텅 빈 채로 이곳에 서 있었다.


나는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입안에 남은 끈적한 단맛이 마치 내 새로운 삶에 대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나는 향기 없는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내 삶의 모든 향기를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


그것이 내가 저지른 일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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