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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마 Sep 28. 2021

이직 한달 차, 또 이직을 결심하다 Ⅶ

왜 나를 놓아주지 못하는가

왜 나를 놓아주지 못하는가


   그만두겠다던 내 말은 개똥으로 들리는지 대표는 계속해서 작업실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프리랜서로 일해! 그러면 해결되잖아. 돈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어!"

   "아니요. 그만둘게요."

   "아 왜그래! 한달만 딱 버텨봐! 아니 딱 3개월만 나 믿고 버텨봐! 내가 연봉도 올려줄게"

   아까처럼 눈썹을 지푸리고 잔뜩 인상쓰며 성내던 인간은 어디갔는지 이번에는 또 빌빌기는 자세가 되서 그만두지 말라니? 하는 게 없고 인센티브마저 주기 아깝다는 직원을 도대체 왜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가? 혼란스러운 와중 대표의 한마디가 모든 의문을 해결했다.

   "XX씨까지 그만두면 이번에 디자이너만 4명째 그만두는거란 말이야...."

   뭐라고??? 4명???? 작년에 창업한 회사에서 디자이너만 4명이라니???

   대표는 내게 전 디자이너가 창업부터 쭈욱 일을 해왔으며 나의 입사와 함께 그만뒀다고 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그런데 막상 전 디자이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대표는 차단되있고 디자이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다시는 이곳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그만둔 디자이너가 나 위에 3명이나 더 있었으며 그것마저 거짓말이었다니? 이 사람의 습관적 거짓말에 정말 넌더리가 났다.

  "한번만 더 믿고 한달만 더 일해줘 제발"

  당장이라도 컴퓨터 들고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왠지 이렇게 그만두면 대표는 월급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불현듯 그런 예감이 훅 밀려온 것이다.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못했고 거기다가 프리랜서 계약서도 없는데 만약 여기서 이렇게 그만둔다면 나는 어떻게 돈을 보장받지? 사무실도 없어서 내 작업실에서 빌붙어있는 인간인데... 불안함이 밀려왔다. 쇼파에 앉아 발 끝을 바라보다가 고민 끝에 답을 냈다.

  "그럼 프리랜서로 일하는 대신 저도 요구사항이 있어요."

  어쨋든 첫 월급까지는 버텨보자 했던 것이다.

  "뭔데?"

  "프리랜서로 계약서 빨리 작성했으면 좋겠구요. 제 디자인 좀 존중해주세요. 자꾸 작업해 놓아도 다 없어지니까 제가 너무 힘들어요."

  "알겠어. 그럼 안 그만두는거지?"

  어쨋거나 계약서라도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대표는 앞으로 절대 디자인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겠다고 하며 결국 또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나도 어찌됐건 계약서가 필요했다. 돈을 받아낼 수 있는 계약서.

  그러나 충격적인 사실은 결국 나는 퇴사때까지 그 어떤 계약서도 작성하지 못했다.


결국 또 제자리


  그렇게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하고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대표가 제품의 상세페이지를 전부 다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기획안을 요구했다. ‘상세페이지 기획안 주시면 바로 만들게요.’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대표는 '기획안'이 뭔지 몰랐던 것 같다. 당황한 얼굴로 '기획안..?' 이라며 되물었는데 왜 기획안이 필요한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작성은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당연히 몰랐을테고..

   면접 당시 대표에게  회사에서 기획업무가 너무 힘들었음을 충분히 이야기했고 대표 역시 나는 디자인 외에는 절대 신경쓸 일이 없게 해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했었다. 요즘은 기획도 척척해내야 제대로  디자이너라지만... 내가 이곳에서 기획안을 계속 요구했던 이유는  회사처럼 업무가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능력부족이라기 보다 대표와의 의견차이를 좁히고 싶어서였다. 우리의 업무는  아래와 같은 식이었다.

  

  이거 디자인 해줘 (아무것도 안줌) -> 열심히 해감 -> 내가 원하던건 이게 아닌데? 역시 너는 하는게 없어


  겪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거 진짜 돌아버린다. 레퍼런스 하나 주지 않고 해오라고 해서 열심히 해가면 '이게 아니다' 하며 똥 씹은 표정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그날 저녁 본인이 다시 만든 디자인을 카톡으로 틱 보내오고, 다음날 갑자기 불러다 앉혀놓고 '너는 손이 너무 느려. 하는 게 없어' 라며 가스라이팅 당할 때..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레퍼런스라도 찾아달라 혹은 간략한 기획안이라도 달라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하다 못해 원하는 컬러라도 정해달라해도 전달 받는 게 없었다.

  어찌됐건 상세페이지를 전부 변경하고 싶다하더니 벤치마킹할 브랜드를 하나 정했다. 그 브랜드는 여성 타겟의 레트로 컨셉의 브랜드였는데 일러스트가 주된 재밌는 상세페이지를 사용했다. 평소에도 좋아하던 곳이었고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아서 신나게 작업에 들어갔고 대표도 2만 픽셀 정도의 상세페이지 기획안을 줬다. 그리고 열심히 만들어 퇴근했더니 그날 저녁 어김없이 대표의 카톡이 왔다. 아무 말도 없이 또 본인이 만든 상세페이지 하나만 틱- 보낸 것이다. 남편과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대표가 보내온 본인이 다시 만든 상세페이지는 계속 회의하고 대화하며 정했던 벤치마킹 브랜드의 컨셉도 전혀 아니였으며 주고받았던 레퍼런스와도 전혀 달랐다. 그리고 심란할 정도의 디자인이었다. 답답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분노가 올라와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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