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호밀밭의 파수꾼-오리들은 겨울에 어디로 가는 걸까

by life barista

진실과 순수


파수꾼은 뭔가를 지키는 사람이다. 콜필드는 무엇을 지키고 싶은 걸까? 꼬마로 상징되는 삶의 순수성 아닐까. 삶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그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순수성과 진정성이 아득한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그는 허상과 실제가 갈라지는 지점에 혼자 서 있다.

콜필드에겐 동생의 죽음 말고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제임스 캐슬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는 몸집도 작고, 연약했다. 손목이 연필 굵기 정도였다. 하지만 제임스 캐슬은 자신이 한 말을 절대로 취소하지 않았던 친구다.


어느 날, 치사한 놈들 여럿이 문을 걸어 잠근 채 그를 위협하고 집단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소신있게 한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결국 그 아이는 소신을 굽히지 않은 채, 그대로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제임스 캐슬도 앨리와 마찬가지로 진실된 자기 삶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랐다. 콜필드는 이런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은 건 아닐까.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호밀들 사이에서 길을 잃긴 쉬운 일이다. 아이들이 방향을 잃고 신나게 달리다 추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뛰어놀던지에 대해선 간섭하고 싶지 않다. 섣불리 누군가의 손을 잡아끌면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며 심각하게 가르칠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는 절벽 끝에 든든하게 서서, 그 누구라도 뜻하지 않게 삶에서 추락하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다.

이 차장은 자신에게 사라진 중요한 걸 깨달았다. 진실된 삶에 대한 열정. 순수한 자기 존재에 대한 갈망. 15년 차 직장인인 이 차장에게 그런 건 흔적조차 없었다. 있다손 치더라도, 차마 부끄러워 말할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어쩌면 저런 손발 오글거리게 만드는 말 따윈 처음부터 그에겐 없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실과 순수. 이 단어들은 어쩌면 우리가 기계와 다르다는 결정적인 선언 아닐까. 모든 것들이 변해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존재의 의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들. 이 차장은 그동안 그런 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승진과 더 많은 연봉에 목매달아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가 쭈뼛 섰다.


승진 못 했다고, 평가가 불공평하다고, 세상 참 더럽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었다.

내 삶에서 진실과 순수를 향한 질문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해야 옳았다. 콜필드가 겪었던, 아니 인간답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빛나는 우울감이 자신에겐 없다. 그 대신, 퇴직 때까지 벌 수 있는 돈을 계산하다 목덜미가 부르르 떨렸다. 그런 식으로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데 누군가 자신의 목덜미를 낚아채 올려주면서, "괜찮다"고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 차장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속으로 삼켰던 생각들을 누군가는 용감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회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던 내부고발자들. 그들의 주장은 하나같이 옳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지병처럼 오랫동안 시달렸던 문제들이라 하루 이틀 고민한 주장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생각하고, 곱씹고 곱씹다 용기를 내서 회사에 올바르게 요구했던 문제들. 그들은 적어도 이 차장 자신보단 진실과 순수에 가까웠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에게 했던 험담이 또렷이 들렸다. 그 많은 회사 밥을 어디로 먹은 거야? 알만한 사람들이 더 한다니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상 다 그런 거라며 타협의 단물을 빨다가, 자기가 원할 때 승진 못 했다고 우울해하는 자신이 내로남불의 결정판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딱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다.



오리들은 겨울에 어디로 가는 걸까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뒤표지가 완전히 덮이기 직전,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는 자조섞인 한탄 사이로 질문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센트럴 파크 남쪽 연못에 있는 오리는 겨울엔 어떻게 되는 걸까?


따뜻한 봄에 우아하게 헤엄치던 오리들. 겨울에 연못이 꽁꽁 얼면 오리들도 꼼짝없이 죽는 걸까? 콜필드는 이 오리들 걱정을 여러 번 했다. 콜필드는 왜 그랬을까?


힌트는 콜필드가 좋아하는 것 중에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적 견학 수업 때 수없이 방문했던 박물관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10만 번을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리를 낚은 채 그대로 있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터였다. 그 안에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가 회전목마를 좋아하는 이유도 언제나 똑같은 음악이 나온다는 점 때문이다.


이 차장은 콜필드가 겨울철 오리를 걱정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람은 늘 변화와 마주한다. 입는 옷이 바뀌고, 홍역 탓에 짝꿍이 바뀐다. 매일매일 경험도 바뀐다. 심지어 그는 길가 웅덩이에 떠 있는 기름 무지개를 본 것도 뭔가 달라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계절이 바뀌면서 연못이 얼고, 그 위에 살던 오리들이 뭔가 해야만 하는 상황 변화는 콜필드에게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콜필드는 그 오리들의 우아한 모습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 소중한 오리들은 겨울이라는 매서운 변화를 어떻게 이겨내고 있을까? 누가 트럭을 몰고 와서 싣고 가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따뜻한 남쪽 나라까지 자기 힘으로 날아가는 걸까?


먹을 것이 없어 오리들이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는 건 자연의 섭리다. 그렇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화에 맞서야 한다. 콜필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변화의 순간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자기 자신을 내동댕이쳐 왔다. 동생의 죽음, 친구의 자살 그때마다 반복되었던 낙제와 퇴학 그리고 이제 4번째 퇴학을 당한 콜필드. 그는 겨울철 오리들로부터 뭔가 얻고 싶었을 것이다.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차장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데워지는 것도 같이 느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이 좋은 것도, 끝이 나쁜 것도 아니다. 시작과 끝이 어우러져 전체를 이룰 뿐이다. 해가 뜨기만 하고 지지 않는다면 지구는 타버릴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기만 하고 죽지 않으면 그런 비극이 또 없을 것이다.


올라갈 때가 있는가 하면, 내려올 때가 있고, 편할 때가 있으면 어려울 때도 있는 법이다. 어떤 산이 오르막으로만 되어 있고, 어떤 강이 바다를 피할 수 있던가.


세상은 이처럼 음과 양이 조화롭게 만든 하나의 작품인데, 한 줌 재에 불과한 인간이 자기 입장에 맞추라고 하면 자기만 우울하다. 물론 퇴사나 죽음 등을 미리 앞당겨 불안을 예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구 말대로 현재에 이미 와 있는 미래라는 게 있다지 않던가. 변화에 차근차근 준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회사생활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차장은 이번에도 자신이 한 뼘 더 성장했다고 느꼈다.

역시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갑자기 온다 간다 말도 없이 퇴사했던 선배들의 얼굴이 자동 재생되었다. 이건 무슨 심리지? 전화라도 걸어볼까? 이 차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아니다. 콜필드가 그랬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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