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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May 28. 2021

8:48

8:48     


지각이다. 뛰어야 한다. 내리기 한 정거장 전부터 난 지하철에서 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비듬도 한번 쓸어내리고, 머리도 옆으로 넘겼을 시간이지만, 지금은 숨 쉬는 것조차 아깝다. 내릴 역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여전히 8:48이 선명하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을 밀어부쳤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도망쳤다. 이처럼 오르던 계단을 토끼처럼 뛰어올랐다. 개찰구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찰라에 끼어들면서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와 동시에 긴 팔을 이용해 카드를 내밀었다. 새치기 맞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입으론 다시 “죄송합니다.”, 속으론 “앗싸!”.     


이번 계단은 3번 굽이쳐 있다. 그러나 저 정도 높이론 지각만은 절대 할 수 없다는 회사원의 강철 의지를 꺾을 순 없다. 이번엔 캥거루로 변신해 도약한다. 발목은 흔들, 무릎은 시큼. 이내 심장이 그만하자고 한다. 그래,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며 몇 걸음 걷는다. 그러나 다시 8:48이 혼령처럼 나타났다. 발목도 무릎도 심장도 돌변한다.


너 미쳤어? 저성과자인 주제에 지각까지 할 셈이냐?

아니야, 아니야, 내가 다시 잘 해 볼게...     


간신히 지하철역을 벗어났다. 이제 계단은 없다. 평지에선 승부를 걸어볼만 하다. 이 와중에 어르신들은 도대체 이 수많은 계단들을 어떻게 이겨내시나 오지랖 작렬.


부슬부슬 비는 오지만, 우산을 펴진 않는다. 맞바람 저항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횡단보도 2개를 5G 속도로 건넜다. 여기서부터 5분 거리에 회사가 있다.      


제발 5분만 남았길. 간절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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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갈매기와 파도 소리가 들린다.

여긴 어디, 난 누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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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에 뜬 현재 시각은 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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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을 빠르게 뒤로 돌려본다. 다시 지하철 애오개역. 여기서 확인한 시각은 8:48, 한 정거장 후인 공덕역에서 확인한 시각도 8:48. 2분이 흘렀으니 분명 8:50이어야 하는데?      


지하철 시계가 고장이었구나. 지하철 시계도 고장날 수 있구나. 지하철 시계를 왜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을까? 것도 모르고 사람들을 밀치고, 계단을 뛰고, 새치기했구나. 자신을 모질게 혼냈구나. 비까지 맞으면서 미친 듯 뛰었구나.      


아침마다 좋은 글귀는 보내주시는 분이 계시다.

오늘의 글귀는, “삶을 허겁지겁 살지 않기, 생의 정수만을 음미하며 살기”였다. 고장난 걸 기준으로 삼으면 삶을 허겁지겁 살게 된다. 잘못된 기준에 속아 열심히 달리면 자신과 이웃들을 못살게 만든다.

     

지금 내 삶의 기준은 고장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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