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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Jul 29. 2021

사람 사는 소리

“내 방에 안 들어오더라도 밖에서 사람 사는 소리가 나서 좋았는데.”     


아들 내외와 함께 살다가, 얼마 전 혼자 살게 된 94세 할머니.

아들도 며느리도 당신 방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방 밖에선 웃음소리, 밥 먹는 소리, 전화 받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사는 소리가 났다. 이젠 그나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일상의 소음, 그 소리가 할머니에겐 자신이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지금은 그 신호조차 숨을 죽였다. 할머니는 죽은 사람의 눈처럼 깊은 눈을 허공으로 옮겼다.      


사회복지사는 행정일이 남아 다시 오겠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정말이냐? 정말 월요일에 또 오냐?”고 환하게 되물으셨다. 사회복지사는 잠시 먹먹해졌다.

할머니께서는 다음 주부터 요양보호사가 매일 당신 집에 온다는 설렘으로 잠이 안 온다고도 하셨다.

할머니라고 왜 삶이 복작복작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그것도 한때. 그 시절이 지나가니 이젠 누군가 온다는 말만으로도 한없이 설렌다.      


이게 사람 마음이구나. 그는 할머니 얼굴에서 자신을 봤다.

누군가 온다는 사실에 잠을 설치는 할머니.

나는 뭣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지? 동지섣달 꽃 본 듯 날 좀 봐 달라고 갖은 앙탈과 술수를 벌였지만, 아무도 나를 주인공으로 보지 않았다. 괘씸한 마음에 난 잠을 잘 수 없었다.

내 방엔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그리운 할머니.

나는 무엇이 그리웠지? 당신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 당신이 최고다, 당신 덕분에 산다, 그저 나를 띄워주는 말들이 그리웠다.   

   

동시에 여럿이 내 이름을 부르고, 이것 저것 해달라고 하고, 밥 먹어라, 일찍 들어와라, 술 좀 그만 마셔라, 한낮엔 그늘로 다녀라, 마스크 꼭 써라.

이런 잔소리만 없으면 살 것 같았다. 혼자라는 것,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에 자유를 느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다른 사람이 거추장스럽다.

다른 사람 따윈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존재로 떨어진다. 그런 존재들과 마음을 같이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기적이다.  

    

94세 혼자 사시는 할머니 말씀에는 쉴 곳이 있다.

깊은 찬 우물에서 올린 물처럼 맑은 말. 그런 말들에는 날 좀 봐달라는 욕심이 없다. 너 좀 이용해 먹자는 계산도 없다. 대신 삶의 지혜가 출렁거렸다.


반면, 내 말에는 쉴 곳이 없다.

안 그래도 좁디좁은 마음 한복판에 뚱뚱한 몸뚱어리가 드러누워 비키질 않는다. 도대체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다. 누군가 들어오려면 쌍욕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삶의 어리석음이 빼곡하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거리를 두자고 한다.

거리를 두는 것이 함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이 어려운 말을 모두 쉽게 이해했다.

지금 보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말은 죽음이 삶을 비춘다는 말이다.

늙음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은퇴 그리고 죽음이 얼핏 보이는 나이가 되니 이제 그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된다.


코로나보다 훨씬 일찍 우리에게 왔고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늙음과 죽음.  

94세 할머니에게 말하는 법을, 사람보는 법을, 살아가는 법을 새로 배운다.

배운 걸 써먹을 날이 너무 빨리 오면 어쩌나 내심 걱정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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