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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송 Aug 05. 2024

푸른밤의 사과

정다운 이야기 속에 제주의 밤은 깊어갔다. 모두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 오래된 추억까지 소환하며 떠드는 중이었다. 옛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생각에 잠긴 엄마는 대뜸 “송이 아빠, 우리 송이에게 사과합시다” 하며 날 바라봤다.


어릴 적, 집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장소였다. 아빠의 발기척이 들리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늘은 별일 없이 넘어가길 빌고 빌었다. 어리고 겁 많던 그땐 두 분을 말리지 못했다. 그저 공포의 순간이 제발 끝나길 이불 속에 숨어 기다리는 일만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내가 울면 어린 동생들은 따라 울었다. 부모님의 극심한 다툼은 자주 날 무력화 시켰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갖는 죄책감,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기력함에 시달렸다.


유독 무서웠던 아빠, 좁은 집에서 아빠를 피할 곳은 없었고 늘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술 깨면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는 아빠는 술만 취하면 온갖 말을 늘어놓았다. 아빠에 대한 어려움과 엄마를 향한 안쓰러움, 동생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 자연스레 철이 들었다. 어릴 적 별명이 애어른이었다. 어딜 가도 어른스러운 큰 딸이라며 칭찬받았지만 강제로 커버린 꼬마 아이는 마음의 공백을 감당할 길 없어 많이 많이 울었다.


긴 시간이 흘렀고 아빠는 변했다. 더 이상 고성이 오가지 않는 날이 왔지만 내 맘 구석구석 남은 상흔은 가끔 고갤 빼꼼 내밀곤 했다. 슬픔이 몰려올 때면 그 시절, 내 잘못은 없었다고 나를 수없이 위로하며 달랬다. 


"송이 아빠, 우리 송이에게 사과합시다"


엄마는 어린 시절 내가 정면으로 마주했을 공포와 불안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그날 엄마 아빠는 돌아가며 내게 사과했다. 너도 어렸는데 마음에 얼마나 응어리진 게 많았겠냐, 많이 힘들었겠다, 미안하다 하시며 손을 꼬옥 잡았다. 내가 견뎠을 무력감, 절망감, 서러움을 알아주듯 내 손 등을 쓰담쓰담 매만졌다. 단단하고 따뜻한 두 분의 손을 잡고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또 울었다.


실은 괜찮다고, 다 지난 일이라고 말하려 했었다. 그러나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뱉지 못하고 터져버린 울음은 쉬이 멈춰지지 않았다. 수천 번을 스스로 위로했어도 나아지지 않던 마음이 그 순간 부모님의 말 몇 마디와 손길로 단숨에 아무는 듯했다. 어쩌면 그토록 기다려왔던 말이었을지 모른다. 애썼다고. 너무 일찍 철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이불 속 숨죽여 울던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길고 긴 터널 같던 슬픔의 여정이 제주의 밤 덕분에, 부모님의 용기 덕분에, 따스한 명월리의 기운 덕분에 막을 내렸다. 


제주의 푸른 밤은 상처를 아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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