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원주까지는 차량으로 약 두 시간 남짓. 가벼운 드라이브라 하기엔 조금 멀고, 본격적인 여행이라 하기엔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적당한 거리다. 강원도의 관문으로 불리는 원주는 교통의 요지답게 기업들의 워크숍이나 세미나 장소로 자주 선택된다. 산으로 둘러싸인 청정 자연환경과 상대적으로 완만한 지형 덕분에 골프장도 밀집되어 있어, 여행보다 활동적인 여가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매력적인 목적지다. 그렇게 원주는 서울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삶의 속도를 느리게 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원주(原州)의 지명을 한자 그대로 풀어보면 '언덕(原)의 마을'이다. 완만한 언덕과 들판이 어우러져 자연과 도시의 경계가 모호한 지역이다. 뮤지엄산은 이러한 원주의 지리적 특성을 가장 절묘하게 구현한 곳이다. 실제 이곳을 찾아가 보면, 이름에서 상상한 그대로의 완만한 구릉과 자연이 건축물 사이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뮤지엄산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면,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작품답게 수많은 글과 리뷰가 쏟아진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수많은 리뷰 속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키워드는 '산책'과 '나들이'였다. 분명히 이곳은 미술관인데, 사람들은 전시 자체보다 야외를 거니는 경험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대체 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걷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안도 타다오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떠올린 이미지는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아름다운 산과 자연의 아늑함"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뮤지엄산의 외부 공간은 웰컴센터에서 플라워 가든, 워터가든, 본관, 명상관, 스톤가든을 거쳐 제임스 터렐관까지 약 700m의 길 위에 길게 늘어뜨려졌다. 방문객은 이 길을 걷는 동안 자연스럽게 계절을 읽고 풍경을 관찰하게 된다. 봄에는 꽃잎이 흩날리고, 여름엔 푸르름이 눈부시고,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흩어져 있다. 뮤지엄산에서 걷는다는 행위는 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가장 긴 끈이다.
내부 공간 또한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안도 타다오가 자주 사용하는 ‘Box in Box’ 컨셉이 적용된 건축은 중앙의 개방된 큰 홀 대신, 중앙을 두꺼운 벽체로 막고 미로 같은 동선으로 관람객을 가장자리로 돌린다. 하지만 사방으로 난 창을 통해 끊임없이 바깥 풍경을 마주하기 때문에 답답한 느낌이 없다. 걷다가 멈추고, 멈추어 바라보는 구조 덕분에 걷는 행위 자체가 미술관의 전시 콘텐츠로 변모한다. 마치 숲길을 걷다가 탁 트인 전망을 발견하는 느낌이 건물 내부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이쯤 되니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는 왜 이토록 ‘걷기’를 특별하게 여길까? 최근 한국에서는 특정 ‘길’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드는 사례가 많아졌다. 가로수길, 경리단길, 송리단길 등 모두 목적 없이 걷고 구경하며 즐기는 공간이다. 걷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본능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손 위의 햄스터를 바닥에 놓으면 목적지도 없이 뽈뽈 기어가듯, 인간도 다르지 않다.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관찰하고 발견하는 본능이 있다. 안도 타다오는 뮤지엄산을 설계하면서 그런 걷기 본능을 의도적으로 자극한 건 아닐까?
재미있는 점은, 이곳이 ‘산책’과 ‘나들이’의 중간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목적 없이 걷는 행위를 ‘산책’이라 하고, 중간중간 소품샵이나 맛집 같은 작은 콘텐츠가 있다면 ‘나들이’라고 부른다. 산책이 걷기 그 자체라면 나들이는 걷기에 즐거움을 더한 개념이다. 뮤지엄산은 분명한 미술관이라는 목적이 있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은 관람이라는 목적보다는 걷는 순간을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뮤지엄산은 결국 걷기 본능을 자극하고, 목적을 잠시 잊게 만드는 길을 제공하는 셈이다.
제임스 터렐 명상관은 그 길의 하이라이트다. 원형 돔 천장에 뚫린 호라이즌 스카이스페이스는 방문자가 중심에 서면 하늘을 실내로 끌어들인다. 맑은 날엔 투명한 푸름이, 흐린 날엔 흐릿한 먹구름이 천장을 물들인다. 걸음도 시간도 잊은 채 오로지 하늘과의 조용한 조우를 느낄 수 있다. 이 체험은 일반적 전시와 달리 온전히 ‘느끼고 머무르는’ 경험으로 구현된다. 결국 뮤지엄산이 말하는 ‘예술과 자연의 어울림’이 응축된 순간이다.
명상관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니, 이곳에서의 걷기가 특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목표와 성취를 강요하고 빠르게 어딘가 도달하기를 요구한다. 그런 세상에서 뮤지엄산은 목표와 효율을 잠시 잊고 천천히 걷기를 권유한다. 경쟁과 피로를 내려놓고 잠시 숨 쉬어도 된다고 위로한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뮤지엄산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곳에서 목적지에 도달하기보단 그저 걷는 순간을 더 오래 기억했다. 뮤지엄산의 길 위에서 목적을 잊어버리고 천천히 걷기를 배웠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비로소 '걷기'라는 본능에 대한 답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