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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남산을 걸으며

 

''오늘 오랜 시간 함께 남산과 서울시내 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 좋았어!''


40년도 넘는, 오래 묵은 친구가 헤어지면서 내게 건넨 인사말이었다.


나는 지난 추석 연휴를 제외하고 3주 연속 주말마다 남산에 올랐다.


처음에는 화창한 날 대학 동기들과, 두 번 째는 비 오는 날 가족과, 그리고 흐린 오늘까지 출발지는 동국대 캠퍼스로 같았지만, 하산 코스는 모두 달랐다.


오늘은 지난 두 차례 산보하며 눈여겨본 캠퍼스 내 노천카페에 둘러앉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여유도 부렸다.


그리고 나는 동국대 방문이 처음이라는 친구들에게 마치 이 학교 출신인양 이곳저곳을 안내하였고, 그들은 오래전 각자 학창 시절 추억의 편린을 찾는 듯 천천히 캠퍼스를 살폈다.


대학교수인 Y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학교와 분위기를 비교하였고, 요즘 대학의 어려운 현실까지 낱낱이 얘기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만해광장을 힐끔 쳐다본 후에 대학 본관 쪽으로 걷고 있는데 ''K 박사가 왔다!''고 한 친구가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이번 모임에 불참 의사를 밝힌 그가 집안일이 취소되는 바람에 홍일점인 L과 몰래 통화하면서 우리 앞에서 깜짝쇼를 벌리려다 들켰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 모임의 핵심 멤버인 그를 불교행사로 시끄럽고 복잡한 캠퍼스에서 만나다니 이산가족이 해후한 것처럼 기뻤다.


우리는 샛길을 통해 남산 둘레길로 들어왔고, 가을을 재촉하는 듯한 이른 단풍을 쳐다보며 둘 혹은 셋 무리 지어 걸었다.


나는 사계절 남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보았지만, 선선한 가을 아침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오랜만에 산보하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우리는 남산 돈가스 거리로 내려왔고, 학창 시절 돈이 없어 레스토랑에서 비후 스테이크 대신에 돈가스를 칼로 썰던 씁쓸한 추억을 얘기하며 웃었다.


그리고 충무로 일대를 걸으며 명보극장, 대한극장에 얽힌 사연을 얘기하였고, 식객 허영만 화백이 추천한 예스러운 청국장집에서 엄마가 차려준 밥상 같은 편안한 식사를 하였다.


이윽고 내가 5학년 때 나의 모교인 청계초등학교와 함께 도심공동화 현상으로 폐교된 인현초등학교가 있던 동네를 둘러보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반가웠고, 신성상가와 대림상가를 지나 얼마 전에 새롭게 리모델링한 세운상가로 갔다.


한때 컴퓨터 등 전자제품의 메카였던 세운상가는 1967년 유명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고 현대건설이 시공한 우리나라 최초 주상복합건물인데, 연탄을 때던 그 시절에 중앙난방시설을 했다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축제로 북적여서 제대로 걸을 수 없었으나, 과거 칙칙했던 것과는 달리 세련되고 한편 복고풍 분위기도 엿보여 느낌이 좋았다.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세운상가 9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심 풍경이었다.


작년 이맘때 아내와 처음 이곳을 방문해 바라본 북한산과 종묘는 마치 설악산과 신흥사를 옮겨놓은 듯해 감동했지만, 좌우로 시선을 살짝 돌리면 슬럼가로 변해버린, 즉 미추가 공존하는 주변 모습에 충격을 받아 이 풍경을 꼭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넓고 시원한 옥상에서 각자, 단체로 추억을 담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종로 3가 피카디리극장 앞에 있는 H힐링 노천카페(영화 '접속' 촬영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쳐다보며 커피를 즐겼고, 족히 15,000보를 걸은 오늘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세계적인 철학자 니체가 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한 초인이 될 수가 없지만, 나는 값싼 행복을 추구하는 최후의 인간이라도 좋다!


왜냐하면 오늘따라 유독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내가 아직 건강하고, 늘 청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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