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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Mar 21. 2024

어제로부터 반세기

페트릭 스톡스(디킨대학교 철학과 조교수)는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우리는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느낀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하루가 조금 다르게 시작하기만 해도 불안해지더라고요. 오늘은 평소보다 십 분 정도 늦었습니다. 간신히 선크림과 눈썹만 그리고 뛰어나왔어요. 루주는 정류장에서 바르는 기분만 냅니다. 늦지 않게 출근할 수 있을까요.


루틴은 우리를 지탱하게 해 줍니다. 늘  하는 일들이 미래의 나 또한 과거의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게 합니다. 같은 시간도 루틴의 큰 형태이고요. 지나온 과거라는 게 마땅치 않은 경우에도 되풀이되어야 안도합니다. 차라리 깨뜨리고 지우는 게 나은 상태여도 그렇습니다. 느리게 달리는 것만 같은 버스 바닥으로 작은 빛무리가 일렁거립니다. 춘분이 지나니 이렇게나 밝네요. 아, 늦어서 그럴 수도 있고요. 느린 김에 시집을 펼칩니다.


"기적이라는 건 만년설이 쌓인 미래 같은 것. 그 속에 맥락 없이 존재하는 벼랑은 신의 장난질이지. 무언가 빠르게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손끝에서 분명한 통증이 인다. 애인은 갈증이 나는지 침 마른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소리는 허공을 지우는 담배 연기처럼 아스라이 멀어진다. 이제 아사코는 물잔을 건네며 말한다. 일어나. 반세기가 지났어. 애인의 따듯한 손이 아사코의 손을 잡는다." 박은정, <아사코의 거짓말> 중


버스가 텅 비었습니다. 다들 언제 내렸나요. 이 차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어제로부터 반세기는 지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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