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한테 허락을 받았지만 또 잔소리할까 봐 안 했다는 것이다. 안 한 이유를 아빠가 물어봤으니 대답하는데 조심스러웠다.아빠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큰 바위얼굴들처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내 별명은 "큰사람"
아이가 좋은 결정을 하도록 돕는 게 부모인데 세 아이를 양육하다 보니 항상 관리하는 습관 탓에 자꾸 아기 대하듯 대신 결정해 줬다. "이게 제일 낫겠다." "그거 아닌 거 같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결정해도 못하게 하고, 아이는 싫은데 좋다고 판단되면 강압적으로 시키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면서 자기 의견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제 이런 것들은 네가 결정해도 된다"라고 말해줘도 부모에게 결정을 맡긴다. 이유는 직접 결정하는 것이 불편하고 부모가 결정하게 되면 문제가 생겨도 혼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도 "안돼!"라는 부모 거절도 많이 당해서 아예 그런 상황을 안 만든다. 아빠는 혼내고 때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가 "큰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들 책상 중에 둘째 아이만 항상 정리가 안된다. 공부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보다 못해 불러서 지적을 했다.
"이게 쓰레기장이지! 책상이니(버럭)? 공부를 어디서 하니? 치워라 쫌" "네.... 죄송해요......"
아이는 뒤돌아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아이들도 슬그머니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늦은 저녁에 간식 먹는데 큰 아이가 둘째의 행동에 대해 폭로했다.
"얘가 인상 쓰고 아빠한테 욕했대요. 아빠가 책상정리하라고 했을 때요~~"
"왜 일러! 오빠!!" "그만해라!! 이놈들(버럭)(버럭) "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의 마음을 몰라주고 싶었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른 탓이다. 우리 아이도 성질부리며 욕도 한다는 것이 믿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대상을 가리지 않고 화도 내고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어른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아빠에게 걸릴까 봐 뒤돌아서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그런 모습이 걸려서 아이 셋 모두 혼날까 봐 큰 아이가 얼른 아빠에게 일러버린 것이다. 나는 "큰사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빠가 정말 '큰사람'으로 보여서 무조건 혼내고 지적하는 대로 행동하는 편이었다. 아빠 앞에서 편하게 행동하라고 해도 여전히 아빠가 '큰 사람'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아무리 편해도 엄청 혼냈을 때의 무서웠던 아빠 모습이 늘 겹친다고 한다. 마음의 상처 깊이보다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릴 예정이라서 마음이 아프다
종종 나는 아이들 키를 내 키와 비교해 준다. 그러면서 부탁을 한다.
"벌써 아빠 코까지 키가 컸네. 조만간 아빠 키를 넘겠네." 아이 셋이 모두 그런 말을 좋아한다. '큰 사람'을 곧 넘어설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네가 아빠를 내려다볼 때가 되면 예전 아빠 모습이 대단하지 않았다....라고 느낄 텐데!~~ 그때!! 아빠를 무시하지 말아 줘!"라고 부탁을 미리 한다. 그리고 나는 다가올 세 아이들의 사춘기, 중2병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려고 한다.
이제는 아내의 부족한 면을 고치겠다고 지적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아내는 고칠 대상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사는 존재라고 마음에 각인했다. 대신 아이가 대화중 말한 '큰 사람'을 나의 별명으로 삼고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안 되도록 노력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새로운글쓰기 프로젝트 이름도 '큰사람의 깨알프로젝트'로 정했다. 그럴 때만 아이 시선의 감수성, 상상력을 동원해서 감사 외에도 색다른 재미를 찾아내고 있다. '감수성'을 말하다 보니 아이가 학교에서 듣고 왔다며 해준 농담이 생각났다. "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똥꼬가 막힌 사람이래!" "무슨 과학적인 근거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