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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Jun 06. 2024

아이와 함께 세탁멍


아이를 낳기 전부터 세탁기를 보며 멍 때리는, 일명 세탁멍을 종종 즐겼다.



물소리와 모터 소리를 배경 삼아 자기 본분을 다하는 기계의 노동 현장을 보다보면 내 마음도 뽀얀 물에 철썩대며 정화되는 듯하고 어느새 멍의 세계에 접어들면 그것 그대로 평화롭다. 잡생각이 끼어들어도 거품처럼, 물처럼 흘러간다.  


주말 낮에는 바깥 아이들 웃음소리가 효과음처럼 간간이 들린다. 어둑한 저녁이나 비오는 날이면 더 행복하다. 오랜 세탁멍을 위해 세탁조 내부를 볼 수 있는 조명을 켜고, 세탁바구니를 뒤집어 의자로 쓴다. 여기에 냉커피도 타서 옆에 두면 나만의 평안한 휴식처가 마련된다.


하지만 언제고 이 시간을 누릴 수는 없다.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남편이 아이를 봐주는 주말 혹은 연차를 쓴 날이어야 한다. 남편들이 집에서 도피처가 필요할 때 화캉스를 즐긴다던가? 그것이 나에겐 세탁멍이다.


그런데 며칠 전 세탁멍이 꼭 필요했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저녁 8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빨래가 다 되면 9시. 아파트에서 빨래 시간은 중요한데 검색해보니 요샌 맞벌이가 많아 밤 10시까지는 빨래 소음을 이해해주는 추세란다. 그래서 빨래 한 번 정도는 돌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 날은 남편이 많이 피곤했던 날이라 아이를 맡기기 미안했다.


그럼에도 세탁멍은 포기할 수 없었던 난, 아들 로디와 함께 세탁실로 들어갔다.


로디는 어리둥절했지만 종종 세탁조를 돌리면서 재밌어하던 기억이 나서였는지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엄마의 다음 행동을 궁금해 했다. 나는 빨래통을 뒤집어 새 수건을 깐 다음 로디를 앉혔다. 그리고 로디에게 따뜻한 보리차가 담긴 컵을 쥐어줬다.


“엄마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


로디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세탁기 문을 열었다. 쌓여있던 어두운 색 빨랫감을 넣고 탄산소다를 골고루 뿌리고 문을 닫는다. 세제와 백식초를 제 위치에 담고 표준세탁, 물 온도 30도, 헹굼 3번, 탈수는 건조 맞춤으로 설정한다.


마지막.


세탁조 내부 조명을 켠다.


“이제 시작한다!”


시작.


위-------잉.


위-------잉.


세탁조가 돌아가면서 빨래 무게를 잰다. 서너 번 돌고 나면 세탁 시간이 나온다.


50분.


이제 50분간 로디는 엄마와 휴식 겸 데이트를 즐길 것이다.


물이 차고, 세제가 뿌려지고, 뽀얀 거품 속에서 패대기(?) 쳐지는 빨랫감.


반짝이는 눈으로 말도 없이 가만히 세탁기를 보는 로디.


“로디가 입은 옷에는 밥도 묻고, 때도 묻어. 그러면 로디가 목욕하는 것처럼 옷도 목욕을 해야 하는데 지금 옷이 목욕하고 있는 거야.”


“로디 옷이 목욕하고 있어요?”


“응. 로디 몸에 바르는 비누처럼 옷에도 비누가 뿌려지거든. 저기, 저 거품이 막 나오지?”


“거품이다, 거품.”


"그리고 봐 봐. 엄마가 로디 몸에 있는 먼지들을 손으로 닦아내잖아. 옷은 자기들끼리 서로 부딪히고 문지르면서 먼지를 떼. 옷이 돌아가다가 중간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저렇게 먼지가 빠지는 거야.”


(보리차 한 잔 하며) 호로록


난 쭈그려 앉아 무릎에 로디 발을 받쳐주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물과 거품 소리를 들으며 로디와 차를 마시고 한 곳을 향해 바라보는 이 시간이 참 평안했다.


로디와 함께 영화를 보면 이런 기분일까? 남편과도 꽤 오랫동안 가져보지 못한 시간이다.


앞으로 종종 세탁멍 시간을 함께 가져볼 참이다.




사랑하는 로디.


얼마 전 야구에 관심을 가지길래

큰맘먹고 연차 쓰고 너와 함께 야구장에 갔는데

너무, 너무 시끄러워서

1회때 바로 나왔었지.


어린이집에서 뮤지컬을 봐도,

구연동화를  때도

로디는 동물 소리에 울음을 보여.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에어컨 소리가 무섭다며 절대 못 틀게 해.


이렇게 로디는

소음에 예민하고 무서움을 느끼는데

그런 너가

세탁기 모터 소리와 물 소리에는

어쩜 그리 괜찮은지.

뱅글뱅글 돌아가는 빨래들도

한몫 했겠지?


엄마의 쉼을 함께 누려보니 어때?

생각보다 괜찮지?


주말에 아빠도 없는데

엄마랑 또 세탁멍 같이 할래?


이번엔 수건이랑 속옷을 빨아 보자.


로디는 호기심만 준비해.

엄마는 로디의 편한 감상을 위해

보리차, 과자, 안락한 의자를 마련해 둘테니.


기대해줘!

엄마와의 빨래 데이트를 :)




* 표지 사진 출처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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