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에게 가족은 창피하고 미운 존재였다. 왜 우리 가족은 평범하지 않은지, 왜 우리 부모님은 친구들의 부모님 같지 않은지, 내 형제자매는 왜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는지 가족을 떠올리면 온통 부정적인 생각뿐이었다. 따뜻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에겐 가족에 대한 원망이란 마음이 더 커서 좋은 기억들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족에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나는 소원대로 고등학교 졸업 후 다른 도시로 대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레 가족들에게서 독립하게 되었다. 짐을 아빠차에 싣고 떠나려고 집에 남아있는 엄마와 인사를 했을 때, 차 안에서 창문을 열고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을 때, 엄마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차 안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다시는 엄마, 아빠와 예전처럼 매일매일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독일로 간 후, 처음에는 가족들과 통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보이스톡으로 원활하게 통화하기 어려운 때여서 3개월에 한 번 국제전화나 스카이프로 겨우 통화할 정도였다. 독일에서 듣는 가족들의 목소리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미웠던 가족이었는데, 먼 땅에서 힘들 때 가장 먼저 생각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가족이라는 걸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가족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 독일에 있었다. 독일에서 2년에 한 번은 한국을 방문했다. 처음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가족보다 친구들을 만나기 바빴다. 방학 때 한 달 정도 한국에 있었는데, 그 시간이 아까워 매일매일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점점 독일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국을 방문할 때 친구들보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아깝고 하루라도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독일에 갈 때면 마음이 항상 안 좋았다. 가족과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니, 지금 가면 또 언제 가족을 보게 될지 모르니 독일로 출국하기 며칠 전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나중에는 출국할 때 가족에게 공항으로 배웅 나오지 말라고 했다. 몇 번 공항에서 헤어지다 보니 헤어진다는 기분이 더 커져서 눈물의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타국에 있는 동안 부모님은 많이 늙으셨고, 형제자매의 삶도 변했다. 형제자매가 있어서 마음이 참 든든하고 고마웠다. 부모님에게 해야 할 나의 몫을 형제자매가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 가장 기뻤던 건 가족들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자주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나라에 산다는 것이 안심이 됐다. 오랜 시간 명절도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했는데, 한국에 온 후로 벌써 가족들과 명절은 맞이한 지 세 번째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족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하지만 같이 있으면 원치 않게 상처 주는 말도 하게 된다.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다. 좋은 곳을 가게 되면 가장 먼저 가족이 생각난다. 다음에 가족이랑 같이 와야지 하며 사진을 찍어 가족 채팅방에 올리게 된다. 가족이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