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나의 삶에서 기억에 남는 시간 중 하나는 프랑스 떼제(Taizé)에서의 시간이다. 떼제는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의 이름이다. 그곳에서 1940년에 한 개신교 수사님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 공동체의 이름이 떼제 공동체이다. 마을의 이름이 곧 공동체의 이름이 된 것이다. 매년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떼제 공동체를 찾는다. 주로 유럽 사람들이지만, 적은 수이긴 해도 한국 사람들도 꾸준히 그곳을 방문한다. 나는 독일에 있었을 때 떼제를 방문했다. 독일어 시험이 끝나고 대학교에 입학을 준비하기까지 애매하게 남은 몇 달의 시간이 있었다.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아 자유롭게 유럽을 여행하기는 어려웠고, 그렇다고 독일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떼제 공동체에서는 적은 돈만 내고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고, 꼭 한 번 가보라는 친구의 권유에 큰 고민 없이 배낭을 메고 프랑스 떼제로 향하게 되었다.
떼제는 보통 일주일 단위로 방문객들이 찾아오고 떠난다. 일요일 오후에 새로운 방문객들을 받고, 일주일을 보낸 후 그다음 일요일 오전에 그 방문객들이 떠나게 된다. 나는 일주일만 지낼 계획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봉사를 하게 되면 일주일 이상 머물 수 있다고 해서, 오래 머물 생각으로 떼제를 찾았다. 방문객들이 찾아오고 떠나는 것을 네 번 경험하다 보니,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떼제에 온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누군가는 삶이 너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어서, 누군가는 여행 중 잠시 들르는 곳으로, 또 누군가는 삶의 한 부분을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등등,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참 재미있었다. 그곳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 처음 본 사람들에게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금세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평소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던 나였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사랑스러웠다. 한 번씩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떼제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떼제 예배당 옆에 있는 작은 숲을 산책하는 시간이었다. 그 숲에서는 모두가 침묵하거나 아주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고요한 시간을 갖고 싶은 방문객들이 산책하는 곳이니, 암묵적으로 서로를 배려한 것이다. 숲에서 사람들은 누워 하늘을 보기도 하고,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기도 했다. 멍하니 연못을 바라보기도 했고, 자연을 느끼며 그저 걷는 이들도 있었다. 떼제에 있는 4주 동안 나는 매일 그 숲을 찾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도 좋았지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나는 아직 독일 대학교 입학 전이라 두려움이 많았다. 독일어 시험은 다행히 통과했지만, ‘대학교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떨어지면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다시 돌아가는 건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운데…’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숲을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걱정들은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 그 숲에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지니고 있던 편견들,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배운 것들, 느낀 것들을 적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그 숲에서 보냈다.
떼제 공동체에서는 하루에 세 번 예배당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한다. 설교를 듣는 시간은 없다. 기도도 침묵으로 한다.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도 함께 예배에 참여해 노래를 부르고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예배당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정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떼제 노래는 단순한 편인데, 각자 알아서 화음을 넣으며 부른다.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천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천사들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침묵 기도 시간에는 누군가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눈을 뜨고 멍하니 있기도 한다. 처음에는 침묵 기도가 익숙지 않아 그 시간이 어렵게 느껴졌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그 시간이 참 소중하게 다가왔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또는 다 같이 불렀던 노래 가사를 곱씹어 생각하기도 했다. 그냥 마음에서 올라오는 목소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에 집중했다. 꼭 억지로 기도문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침묵 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이 곧 기도가 되었다.
떼제에서의 한 달, 그리고 그 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그 시간이 지금의 나의 가치관을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부족해서 매번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한다. 아직도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때부터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여전히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변하지 않은 가치관이 있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 떼제에서의 시간은 내 삶 속에 항상 존재한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그 시간이 나와 함께 있다. 그 시간의 존재가 오늘도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